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동료가 아파트 아래층 이웃과의 마찰에 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아래층할머님이 핸드폰 진동소리가 거슬리니 침대 위에 놓고 사용해라, 온 식구 모두 집에서는 실내화를 신고 생활해라, 밤 9시 이전까지만 전자제품을 사용해라, 집에 손님을 들이지 마라 등의 디테일한 요구사항을 편지로 써서 동료의 집 현관 앞에 붙이고 가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좀 너무하신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불편할 수도 있는 문제인 것 같았다. 나도 휴식이 필요한 순간 우리 집 위층 이웃의 쿵쿵대는 소리나 새벽녘 알람을 맞춘 핸드폰 진동소리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동료도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려 노력은 하지만 죄송해하고 맞춰드릴수록 아래층 할머니의 요구사항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며 힘들어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점이 아니었단다. 평소에도 너무 착하고 순한 동료의 아들 녀석의 층간소음을 대하는 반응과 행동이었다.
중학생 아이가 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얼마나 힘드시겠냐고, 우리가 더 조심해야 한다며 온 집안을 살금살금 걸어 다니질 않나, 동생과 함께 유튜브를 본다고 베란다 창고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연장자들의 반응은 '뉘 집 아들인지 정말 착하다!'였다. 하지만 90년생 후배의 말은 달랐다.
너무 착하면, 자기가 피곤한 거 같아요. 지금도 벌써 힘들잖아요. 좀 못되지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후배의 그 말은 내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죽어라고 배웠던 말, '남을 배려하자' 혹은 '더불어 사는 세상' 등의 구호들은 살아가는 데 많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던 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에게 양보해라, 타인을 배려해라' 이런 말들이 어릴 때부터 우리 가슴속에 내면화되어 어떤 불편 앞에서도 참고 미련하게 버티며 굳이 남만 위해주다가, 정작 자기 자신은 상처 투성이가 되어버렸던 경험이 한두 번은 있지 않은가.
아이에게 어떤 마음을 가르쳐 주어야 할까?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남을 먼저 배려하라고 가르쳐야 할지, 절대 손해 보지 말고 나를 먼저 챙기라고 해야 할지.
어른의 자리는 그래서 더 어려운 것 같다. 나도 잘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니까.
이렇게 말해주면 어떨까.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간에 '네 마음이 편한 대로 해, 하지만 남도 나처럼 편해야지'라고. 남을 배려하며 내 마음이 다쳐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기만 하며 내 마음만 편해도 안된다는 말을 덧붙이며.
아이들도 어려울 것 같다. 세상은 엄마의 가르침대로, 교과서에 쓰여있는 대로가 아니니까.
우리에게 좀 못돼도 괜찮지 않냐고 의견을 내었던 90년생 후배는 직장에서 늘 배려심 많고 싹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직원이다. 그러니 그도 남을 너무 배려하면 자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너와 나 모두가 편한 그 점은 어디일까? 그 점을 잘 알 수는 없어도, 네 마음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만의 어떤, 편안한 그 '지점'을 향해 가자고, 난 80년생이나 90년생, 아이들을 포함함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