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녁 퇴근하면 나는 손을 씻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그건 티브이 리모컨을 들고 7번을 누르는 것이다.
엄마 또 생생 봐?
애들이 할머니 같다고 놀리며 지나간다. 나는 누가 그러거나 말거나, 티브이를 틀어놓고 내 할 일을 한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밀다 맛집과 먹방의 과장된 인터뷰를 잠시 멈춰 서 보기도 하고 주부 살림의 꿀팁을 소개할 땐 핸드폰의 메모장을 열어 저장해 두기도 한다.
이제 할 일을 다 마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일드라마를 감상할 시간이다. 어제는 퇴근이 늦어 보지 못했어도 상관없다. 늘 그 얘기가 그 얘기. 착한 주인공이 악녀로 인해 곤궁에 빠졌다가 복수를 다짐하고 되갚아주는 스토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나도 한땐 그야말로 '수준 있는' 작품들만 골라보던 시기가 있었다. 20대 초반엔 예술영화만 상영한다는 '동숭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았고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작품은 꼭 챙겼으며 책 또한 많이 읽으려 얼마나 노력을 했던지. 한데 나이가 들어가니 참 이상했다. 엄마가 즐겨보던 티브이 프로그램을 하나둘씩 보고 앉아있는 내가. 나도 그야말로 '아줌마 프로그램'을 보는 엄마를 솔직히 좀 무시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루 종일 그야말로 고된 노동을 겪고 들어오니 심각하게 마음에 남는 그런 생각을 요하는 작품들보단,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웃고 욕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 됐다. 아, 엄마가 그래서 저녁 설거지를 마치면 일일드라마를 보며 쉬었던 거구나, 이해를 하게 되었다. 조금 드는 걱정은 휘발성이 강한 것들에 어쩌면 조금 중독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내 시간이 충분히 날 때면 열심히 책을 읽고 영화를 챙겨본다. 나도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고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사랑한다고!
오늘도 난 퇴근 후 집에 가 질펀하게 누워 일일 드라마를 볼 것이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보려고 아껴두었던 영화도 보고 책도 읽을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문화생활을 즐기는 내가 좋다.
다소 양극단의 취향을 가진 사람이지만 뭐 어때. 어떤 것이든 그 순간의 지친 나를 위로해 주는 세상 합법적인 것이라면 아무거나 괜찮다. 힘든 시간은 얕은 물로 흘려보내고 나를 채우는 시간은 깊은 물로 채우면 된다고, 늙어가는 나에게 한없는 너그러움을 가지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