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이들이 인별그램을 보다 신기한 물건이나 이슈가 있으면 나에게 공유를 한다. 그러나 솔직히 어느 포인트에서 어떻게 웃어야 할지를 모르겠고, 재밌다고 하는 영상도 내 눈엔 하나 재밌지가 않을 때도 많다.
"엄마, 이 여자 몇 살처럼 보여? 엄마랑 같은 나이야. 대박이지?"
아무리 봐도 영상 속 여자는 내 나이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콜라병 같은 몸매에 찰랑이는 긴 머리. 누가 봐도 이십 대 후반의 여잔데? 놀란 것도 잠시. 갑자기 슬그머니 화가 오르기 시작했다. 근데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건데? 뭐 어쩌라고? 나도 자극받아서 몸매 관리나 피부관리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그건 아니고, 그냥 엄마랑 같은 나이라고 하니깐 한번 보라는 거지."
딸아이는 엄마의 과민 반응에 흠칫 놀라며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나는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의문의 여인에게 1패를 한 거 같은 느낌이 들어 입이 나와버렸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엄마 뭐 자격지심 있어?"
내 입에 대못을 박듯 아이가 쿵 하고 망치 같은 말을 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내가 인별그램 속 그녀가 될 수 없던 수십 가지 이유가 가슴속에 줄줄이 변명 비엔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 전 읽었던 신문기사에서 동창회와 샤넬백의 상관관계를 읽고 굳이 자신을 가방이란 액세서리로 포장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을 내심 비난했었다. 그러나 영상을 보는 그 순간에 인별그램 속 여자와 나 자신을 비교하는 것도 결국 그들과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다.
별것 아니라 생각하고 싶었다. 마치 내 손에 든 사탕을 쥐고도 다른 아이의 사탕을 부러워하던 세 살배기 아이처럼, 유치하고 단순한 질투심이라고 애써 내 감정을 무시하고 자존심 상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마흔의 질투심은 좀 달랐다. 팽팽한 그 얼굴이, 예쁜 그 옷과 몸매는 고생을 모르는 것 같았다. 초라한 애 둘 엄마의 일상은 빛나는 그 여자의 일상과는 많이 다르니까.
나의 자격지심 속에는 세월이 담겨있었다. 잘 살아보고 싶었던 이십 대의 욕망과, 좋은 아내이자 엄마로, 착한 며느리로 노력했던 30대의 수고가 한데 뒤엉키고 말았다. 그것이 꼭 후회라거나, 슬픔이거나 해서 서러운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오랜 세월을 감내하며 삼켰던 내 눈물과 수고가 생각이 났을 뿐.
마흔은 아직은 좀 그런 나이일 수도 있다. 젊음에 담그고 있던 마지막 새끼발가락을 꺼내 중년으로 가는 찰나. 이제는 무언가 포기도 해야 하고 내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그런 나이.
그러니, 자격지심이 좀 있다고 나보다 잘 살아 보이는 누군가가 부럽고 멋져 보인다고 기죽지 않다고 된다. 이 감정은 잠시 후면 또 잊게 될 것이고(젊었을 때보다 훨씬 빨리 잊는 축복이 우릴 기다리고 있으니) 예전에도 그랬듯 곧 편안해질 것이 아닌가. 자격지심 좀 가진 마흔이면 어때. 인별그램 속 여자보다 예쁘진 않아도 나도 나름 잘 살아오고 있다. 정말, 정말 그렇다.
사진/ 영화 '마미'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