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서로 돈이 없던 학생 시절에는 그 친구를 만나게 되면 늘 더치페이를 했다. 용돈 받아쓰는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먼저 취업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생겨났다.
한 날은 둘이 함께 쇼핑을 나갔다. 서로 옷을 봐주고 고민을 얘기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문제는 식사 시간이었다. 돈을 내려고 하는데 친구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같이 돈 내는 게 아니었나? 먼저 일어난 내가 나가 계산을 했다. 그리고는 친구가 나오면서 잘 먹었다고 말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산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
친구의 그 행동은 나를 만날 때마다 계속됐다. 늘 만나면 내가 밥을 샀고 친구는 기껏해야 정말 어쩌다가 커피 한잔뿐이었다. 자신이 커피를 살 때면 꼭 저렴한 브랜드의 커피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친구에게 이용당하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친구는 취업을 준비하는 중이어서 경제적으로 힘드니까.’라고 마음 넓은 척 일부러 친구의 사정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친구가 좋은 직장에 취직해 돈을 벌기 시작해도 친구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도대체 얘한테 뭘까?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바보같이 느껴져 마음이 어지러웠다.
회사에서도 직원들끼리 함께 밥을 먹으러 갈 때는 난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밥을 사는 건 뭔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더치페이를 하자는 말도 잘 안 나온다. 내가 끼어 함께 가면 꼭 제일 비싼 메뉴를 시키며 나에게 잘 먹겠다는 인사를 먼저 하는 얄미운 후배도 있었다. 혹여 더치페이하더라도 식사 다음에 마시는 커피를 각자 사 먹자고 먼저 말하기도 힘들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나이가 많은데 ‘네 것은 네가 내’라고 하기가.
남에게 나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나는 아직도 친구에게 내 서운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회사에서 같이 나가서 먹는 점심시간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나의 성격은 쇼핑할 때도 참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옷을 입어보려고 들른 가게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입어보다가 결국 아주 친절한 점원의 서비스에도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가게를 그냥 나와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고객님께 맞는 옷을 가져와 볼게요.’ 하며 헐레벌떡 백화점 지하 창고에 내려갔다 오는 점원의 성의와 수고가 나는 너무 미안해서 옷을 산적도 많다. 하지만 정에 이끌려 내 의도와 다른 구매를 했을 땐 쇼핑을 하고도 어쩐지 시무룩한 기분이 들어 찝찝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의 소비
직장에서 만난 또 다른 후배 C는 자린고비로 유명한 성격이었다. 여자들이 많은 직장에서도 굳건히 쇼핑의 지조를 잃지 않는 사람. 그게 바로 C였다. 누군가 아웃렛에서 명품 백을 사 왔다고 하더라도 심드렁하게 아 그래. 하고 눈길도 주지 않던 C가 남자 친구를 사귀고 나자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간 절대 하지 않았던 인터넷 쇼핑도 하고 퇴근 후에는 남자 친구 선물을 산다며 서둘러 백화점도 갔다.
그런데 한 날은 점심시간에 탕비실에 앉아 골똘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C의 모습이 어딘가 평소 같지 않았다.
왜, 뭐 걱정거리 있어?
팀장님, 남자들 벨트는 어떤 게 좋은 거예요? 남자 친구 첫 번째 생일이라 나름 준비해서 백화점에서 벨트를 사다 줬는데 남자 친구가 엄청 실망한 모양이더라고요. 명품 벨트가 아니어서 회사에 하고 가지 못하겠대요. 자기 다니는 회사 사람들은 모두 명품 벨트만 하고 다닌다고요. 그래서 반품하고 다시 사준다고 했어요. 근데 뭐가 좋은 건지 몰라서 고르지를 못하겠어요.
아니, 남자 친구가 그렇게 대놓고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건 너무 하지 않아? 명품이 아니더라도 여자 친구가 마음 써서 준비한 건데. 난 그냥 모른 척하거나 00 씨가 기분 나쁘다는 표현을 좀 했으면 좋겠어.
저도 솔직히 좀 놀랐고 기분도 나빴는데, 그 친구를 좋아하는 감정이 더 큰 것도 있고, 제가 기분 나빴다는 그런 말을 잘못하겠어요. 아시잖아요, 제 성격. 그냥 사달라는 거 사주고 마음 편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 생각엔 팀장님도 그러실 거 같은데요? 히.
결국, 무엇이든 여자 친구에게 사달라고 했던 남자 친구와 결혼한 후배 C. 그녀는 결혼 후에도 쇼핑을 좋아하는 남편의 쇼핑 요구를 들어주느라 바쁘다. 반면,서로의 소비습관을 방관한 채 사랑 하나만 믿고 결혼했던 C의 속병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 주기적으로 내게 이혼이 하고 싶다고 말하는 C를 연애 당시 더 말리지 못한 게 나는 한이 된다.
나의 감정에 솔직해지기
그동안 나는 오랜 기간 친구를 만나며 늘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대해왔다. 만일 내가 친구에게 ‘저번에는 내가 샀으니 이번에는 네가 내.’ 라거나, ‘얼마가 나왔으니 반을 나한테 줄래?’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항상 나에게 밥값을 떠넘기며 비싼 메뉴를 시켜먹는 후배에게는 ‘넌 나랑 밥 먹을 땐 항상 비싼 것만 먹더라. 대표님 하고 먹으면 안 그러면서.’라고 넌지시 얄미운 곳을 꼬집어 봤다면? 만일, 나 같은 성격의 C가 남자 친구에게 명품 벨트를 사주지 않고 기분이 나쁘다는 표현도 했더라면, 정에 이끌리지 않고 이별을 선택했다면 그녀는 지금쯤 행복할 수 있었을까?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바로 두려움이 많아서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겁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감정 때문에 나의 지갑이 축나는 것은 좀 억울하다. 그동안 약한 마음으로 인해 내가 손해 봤던 돈이 도대체 얼마야?
그래서 남에게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솔직한 마음이 불러내는 두려움'이라는 것에 맞설 필요가 있다.
우리 이렇게 할까?
그리고 '아니'라고 말하는 연습
무엇이든 처음이 힘든 법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쇼핑의 잔재들을 정리하며 결국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든든한 통장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아니요’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위한, 나와 같은 타인을 위한 합리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세 명 이상 함께 모이는 모임이 있으면 내가 먼저 단톡 방에 공지 글을 띄운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어본 뒤 예상되는 가격과 금액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좋겠냐고 의견을 구한다.
오래된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서 내가 밥을 사주고 싶은 날은 기꺼이 그렇게 하지만, 뭔가 애매한 것 같은 관계나 만남에서는 '우리 더치페이할까?' 혹은 '밥은 내가 살게. 커피는 네가 사줄래?’라는 말을 먼저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동안 나에게 얻어먹기만 하고 절대 밥 한번 사지 않았던 친구는 연락처를 삭제해 버렸다. 삭제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그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나는 애초에 딱 거기까지였던 사이인 거다.
옷 가게에 가서도 그렇다. 내가 생각했던 비용과 맞지 않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입어보라는 점원의 권유에 ‘골라주셔서 감사하지만 좀 더 둘러보고 오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가게를 나간다. 처음에는 성의 있게 응대해 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그렇게 말하기가 미안했지만, 사지도 못할 거면서 오히려 질질 끄는 것은 그분들에게 폐가 된다는 마음으로 오래 귀찮게 하지 않고 가게를 나온다.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해보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또한, 나만 밑지는 만남을 정리하자 정말 내 옆에 있어야 할 사람들만 남은 것 같아 이제 친구들을 만날 때도 한결 마음이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