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살인마 잭의 집> 잡담 글
봐야지 봐야지 한지도 어언 몇 년이 지나고 드디어 본 영화다.
정신이 피폐해지는 영화만 연달아보다 보니 기분이 묘하다.
한국에서는 '살인마 잭의 집'이지만 원제는 '잭이 지은 집'인데, 둘에 묘한 어감차이가 있다.
한국판은 너무 정직하고 느낌 없는 제목이라, 직역한 제목이 더 간지 났을 것 같은 느낌.
이미지적인 전달과 함의가 강력한 영화이다 보니 글로써 후기를 남기기가 다소 막막한 기분이 드는 영화이다.
그리고 꽤 치는 영화이긴 해도 진입장벽은 좀 있는 영화이니 내면이 말랑하거나 심약한 분들은 시청에 경고를 드리는 바이다.
옛 성당엔 신만이 볼 수 있는 예술품들이 숨겨져 있고,
그 뒤엔 위대한 건축가가 있죠.
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아주 악질적인 영화였다.
이 영화의 흐름은 사람을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 불쾌함 그 자체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더더욱 불편하다. 잭 본인 딴에는 담백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라는 점이 비일상적이고 상식 저 너머의 소름 끼치는 느낌을 준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주인공인 '잭'이라는 살인자가 나온다.
잭이 누군가와 함께 자신의 살인들과 자신의 철학, 예술관(살인관)을 논하며, 무작위로 선정한 다섯 가지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다. 근데 그 사례들이 아주아주...... 쉽지 않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측은지심이라곤 요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사이코패스 살인현장을 관전하는 기분이 든다. 이 점이 굉장히 생경한 영화화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꽤 구체적인 잭의 살인 일대기를 따라가고 있기에 관람객은 좋든 싫든 잭과 함께 그 불쾌한 살인 여정에 함께 따라가야만 한다. '감정 없는 자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감정묘사'라고 해야 할까? 그 비정상적인 살인자의 행동과 내면적 인과들이 괴상망측하기 그지없다.
건축가와 기술자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해?
미치광이가 '건축'이라는 키워드에, 나름의 예술혼을 한껏 담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다.
예술인과 미치광이의 미묘한 차이를 다룬 이야기들은 꽤 있지만, 잭은 직접적으로 이 주제에 냅다 몸통박치기를 하는 인물이다.
예술호소 살인자의 서사를 얼마나 깊게 생각했을지, 이런 구체적인 살인묘사들을 무슨 생각을 하며 최초 구상했을지, 폰 트리에 감독이야 말로 예술과 광기 그 중간쯤에 살고 있는 감독은 아닐지.
잭은 신에 대해 고찰하고, 창조와 파괴, 건축과 해체, 예술의 의미와 자신이 행하는 살인의 예술적 가치 등에 대해 나름의 강력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스스로를 고상하게 생각하는지 '교양 살인마'라는 이름을 자처하기도 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얼핏 뻔한 서스펜스 상업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잭이 감정을 통제 못하고 비정상적인 감정회로를 가진 뻔한 살인자 같아 보이게 페이크를 주는데, 이후 이어지는 내용들은 그가 '단순한' 연쇄살인마가 아니라 오히려 '더 끔찍한' (자칭) 예술가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잭이 내내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대화 상대의 정체는 후반부에 밝혀진다. 자신을 '버지'라고 소개하는 그 노인은 알고 보니 지옥으로 잭을 안내하는 안내자였다.
영화가 진행되며 잭과 버지의 대화를 통해, '버지'라는 이름과 그가 '아이네이스' 이야기를 썼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그는 로마시대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고, 잭이 버지의 안내를 받으며 지옥으로 가는 포맷은 신곡의 포맷을 그대로 따온 것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잭은 마지막 살인에서 피해자가 입고 있던 빨간 후드가운을 입고 지옥으로 향한다. 빼박 단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버지라는 인물은 영화의 메시지적 연출에 있어서 아주 영리한 요소였다.
둘의 대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흐름은 많은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
버지와의 대화에서 '살인에 대한 부연설명(거의 중계해 줌 ㄷㄷ)' + '잭이 갖고 있는 살인과 예술철학'에 대해 구조적인 이질감이 없도록 관객에게 설명이 이루어진다. 작품 속 또 다른 작품을 보는 느낌을 들게 해 주어 아주 신선했는데, 뭐랄까 영화를 보면서 그 안에 있는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게임 '위처'를 하는데 본 게임에 못지않게 즐거운 궨트를 하는 느낌)
버지는 잭과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담화를 하기도 하고 잭을 경멸하기도 한다. 고전문학의 담화를 보는 느낌이다. 버지는 잭의 내면의 말들을 더욱 이끌어내는 장치임과 동시에 관객의 마음도 살짝 투영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게 흥미로웠다. (버지는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잭은 그저 살. 인.★)
웃긴 건 처음엔 버지도 '어디 한번 떠들어봐. 내가 이 일하면서 너 같은 놈 한두명 본 줄 알아?'라는 느낌으로 대화를 시작하는데, 상상을 초월한 잭의 핵똘끼에 '적그리스도 같은 놈. 내가 지옥안내 짬밥동안 너 같은 놈은 진짜 처음이다 ㄷㄷ' 하면서 혀를 내두른다.
결과적으로는 재밌게도 잭은 예술병에 걸린 오만한 고집쟁이기 때문에 단테처럼 연옥의 뱡향을 향해 가지도 못하고 객기를 부리다가 셀프로 지옥의 가장 밑바닥 구렁텅이에 떨어진다. 끝까지 오만한 가치관을 내세운 잭다운 죽음이라 참 한결같은 돌아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예술예술거리다가 갈 때도 예술로 가는 놈이구나 싶기도 했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죽음 이전이 아닌 사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당신은 꽉 막히고 무자비한 노인입니다.
도덕적 잣대로 예술의 가치를 죽이죠.
해방을 원합니다.
예술은 불가해할 정도로 방대하니까요.
영화가 가용하고 있는 촬영기법과 편집기법들이 싸이키델릭 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의 진면목은 미친듯한 연출차력쇼에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시각적인 예술이 피폐한 영화내용과 훌륭한 시너지를 준다.
폰트리에 감독의 편집과 미장센은 아트의 경지가 아닐까? 어찌 보면 예술이라 말하며 살인을 하는 잭은 감독의 예술을 투영한 존재가 아닐까. 감독이 좀 싸하게 느껴졌다.
감독이 아방가르드 그 자체이며 미장센의 귀재라는 생각들은 영화 내내 끊이지 않았다.
버지와 잭이 담화를 할 때마다 다양한 인서트샷이 나온다.
인서트샷의 배치는 암실 안에서 빔으로 작품을 하나하나 보며 전문 도슨트의 스토리텔링을 받고 있는 느낌을 줬다. 이것은 영화를 단순한 '영상을 본다'가 아닌 '예술을 감상한다'로 느껴지게 한다.
어찌 보면 조악한 짜깁기같이 난립하는 여러 화면들은 장면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해치면서 이상한 방식의 몰입을 선사한다.
장면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잭' 그 자체의 연출이려나... 단순한 포스트모던 적인 연출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잭처럼 영감 자체를 화면에 쌓아 올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감독은 미친 사람이 분명하다.(Positive)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단연 두 번째 살인 시퀀스의 카메라웍이었다.
잭의 살인회고로 극이 진행되는 것치고 영화의 흐름은 꽤나 직렬적이다.
특히 그 연쇄살인의 초기에 잭은 상당한 강박증을 보여준다.
잭의 편집증적인 면모를 관객도 200% 느낄 수 있도록 이 시점의 쇼트가 상당히 불안정하다.
그의 강박은 살인을 거듭해갈수록 완화된다. 때문에 세 번째 살인에서부터는 잭의 강박이 상당히 완화된 것을 반영하듯, 쇼트도 덩달아 안정감을 찾는 점도 흥미롭다. 내 기분 탓인지, 그 이후에도 잭의 동요가 있을 때마다 쇼트도 덩달아 불안정해진다.
바로 위에 기술했듯, 특히 이 영화의 두 번째 시퀀스에서 보여주는 쇼트들은 진짜 정신 나갈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잭의 강박이 동기화된 듯, 1인칭스러운 3인칭 화면이다.
잭의 회고 및 회상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잭의 살인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살인을 하는 잭을 집요하게 트랙킹 한다는 점이다. 잭의 바로 곁에 서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화면이 심장박동처럼 흔들리고, 불안하게 시선을 휙휙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집에 미처 닦지 못한 핏자국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등, 보면 덩달아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외출 전 집에 가스불을 안 끄고 왔거나, 에어컨 / 보일러를 안 끄고 왔을 때 시달리게 되는 불안감을 쇼트로 표현하고 있다. 그 미친듯한 편집증의 화면은 직접 보시길..... 아니야... 안 보는 게 정신건강에 좋아....
잭 : 신은 양과 범, 둘 다 창조했죠.
양은 결백함의 표상이고, 범은 야만성의 표상인데, 각각 완벽하고 불가결합니다.
피와 살생이 삶인 범은 양을 죽이고요.
예술가의 본능도 마찬가지입니다.
/
버지 : 자진해서 죽는 양은 없잖나?
아무리 위대한 예술을 위해서라도 말일세.
/
잭 : 대신 예술 속에 영생할 영광을 부여받게 되죠.
'파이트클럽'의 리뷰 이후로 이렇게 내 글솜씨가 한스러운 리뷰가 없었다.
어찌 됐든 잭이 살인과 예술을 찾아다니던 끝에 도달한 예술의 정수는 참 난해하지만 동시에 역겨운 영감을 주었다.
몇 번이나 자신이 짓던 집을 자재가 맘에 들지 않아 허물고 짓기를 반복하던 잭은 종미에 자신이 죽여온 시체를 쌓아 올려 그로테스크한 집을 완성한다.
그 집은 비로소 잭이 향해야 곳인 지옥문을 열어주었고.
도덕과 지고선을 역행한 잭은 자신만의 궁극적인 작품을 남겼고, 이는 예술의 경계라는 게 얼마나 오묘한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예술을 빚어내는 창작자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름의 포즈론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을 아득히 초월하여 오직 탐미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잭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였을까? 궤변 속 궤변 속 궤변과 코걸이귀걸이 같은 예술의 정의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다.
예술이 번쩍하고 발광하는 순간은 수도 없이 많은 요인들이 합쳐졌을 때일 것이다.
또한 암묵적으로 합의된 금기를 넘어선 예술은 '범죄'겠지만, 동시에 담담한 시선으로 본다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아주 희소한 '창조'일 것이다. (Feat. 광염소나타)
예술과 인본주의의 경계와 금기, 이 얼핏 정신 나간 놈이 될 수 있을 질문을 파격적으로 던진 폰 트리에 감독에게 이주 적당한 정도의 박수를 보낸다. 너무 큰 박수보내면 도라희 취급당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