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파이트클럽> 잡담 글
짧은 영화 잡담글_<파이트클럽>
아주 유명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의 의식계층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3단계로 구분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무의식'은 가장 깊이 내재된 정신세계로서 의식의 수준으로 떠오르지 않는 개인 본연의 원초적 본능 계층을 말한다.
뻔히 다 알고 있을 프로이트의 이론을 언급하는 건 '무의식'이란 개념이, 오늘 끄적거릴 영화 <파이트클럽>을 복기하다보면 자연스레 떠오르기 때문이다.
<파이트클럽> 좋은 의미로 미친 영화다.
글에 앞서 한마디로 이 영화를 요약하자면 '발칙하고 시원하며, 쾌락적이고 섹시한, 전위적인 간지또라이 람쥐썬더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파이트클럽은 내재된 원초아 그 자체, 진짜 '날 것'을 영화적(그것도 훌륭한 수준의)으로 그려냈다.
그만큼 아주 깊은 단전부터 내상을 입히는 영화기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었다.
렘수면 중이던 예술적자아에 찬물을 확 끼얹는 듯 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에 자취방에서 불 꺼놓고 쭈그린 채 영화를 봤는데, 밖에 나가서 비에 쫄딱 젖은 채 트리플악셀을 돌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시원하다. 뻔하디 뻔한 낮은 온도에서 느끼는 시원함의 표현이 아니다.
(물론 실제로 영화가 다소 시니컬한 면도 있지만.)
살다보면 가끔 몸에 가려운 곳이 있을때 어디가 가려운지 대충은 짐작하지만 피부속이 가려운 것 처럼 가려운 곳을 정확히 찾지 못할 때가 있다. <파이트클럽>은 피부 속까지 드러내어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영화이다. 그야말로 내면의 본질적, 의식적 개운함이라고 할 수 있다.
본격 때밀이 영화.
이케아 가구의 노예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정말 불편할 정도로 적나라하지만 아주 본질적이어서 오히려 숭고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자본사회의 망령이 되어 뻔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모두에게 의문을 던진....다기 보단 죽빵을 꽂는다.
극 중에서 주인공(에드워드 노튼)은 자신을 '이케아 가구의 노예' 라고 표현한다.
내 기준 너무 힙해서 감탄스러운 표현이었다.
이 표현은 주인공의 상황,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조한다.
요즘 한국사회인들은 'MBTI의 노예'가 아닐까? ㅎ.ㅎ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이트클럽>은 터프한 영화이다.
그 터프함은 어떠한 '금기'에 대한 도전에서 기인한다.
앞서 말했듯 무미건조했던 주인공에게 어느날 나타난 비누장수 더든(브래드 피트)은 정말 기이한 철학(철학따위를 부숴먹는게 그의 철학일수도)을 지닌 노빡꾸남이다.
내재된 폭력성과 억압된 야수성을 여과없이 뽐내며, 학습된 사회성 따위들은 개나 줘버린 더든.
그는 처음 미간에 절로 주름이 잡히는 파격으로 등장하여 이내 금기에 들이받는 강력한 카타르시스적 존재가 되어버린다.
여과없는 아나키스트같은 그 모습은 포스트모던의 포스트모던처럼 보이기도 한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그는 그저 싸움, 투쟁, 혁명을 외치는 중2병 전쟁광일 수도 있겠다.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brighteous_/221038278084>
살아있음에 대한 증명
"싸움을 주저하지마"
"싸워보지도 않고 아무 흉터없이 죽고 싶지않아."
"넌 언젠가 죽는걸 깨달아야 해"
"텔레비전을 보고 락스타와 백만장자를 꿈꾸지만, 우린 이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걸 깨닫게되고, 우리는 개빡치게 되지"
더든은 자기계발의 쓸모없음을 설파하고 자기파괴와 폭력성을 강조하며, 사회에 젖은 솜인형들인 '파이트클럽'의 사람들을 고양한다.
이는 언젠가부터 숨쉬는 것 처럼 당연히 껴안고 있는 사회적 치장들을 내려놓았을 때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워 지는지, 미칠듯한 날 것의 쾌락을 조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파격적인 설교였다.
알몸으로 본능에 몸을 맡기라는 그의 슈퍼극단적인 사상은 이상하게도 묘한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더든이 너무나도 매력적이라서.
영화를 보면 극 중 더든역을 맡은 빵 형님의 멋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데, 브래드피트는 영화에서 정말 그야말로 한마리의 야생마다. <파이트클럽>은 99년도 작품인데, 세기말에 결국 브래드피트는 섹시다이너마이트의 도화선을 다 태우고 섹시함이 폭발해버린 것 같다.
세기의 섹스심볼로 남기위한 그의 세기말 막판 스퍼트는 영화를 보지 않으면 설명이 어렵다.
보면 된다. 고삐 풀린 야생마를.
영감의 영상화
보통 영화영상은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영감으로부터 태어나 관객에게도 그 영감을 전달하려 한다.
난 <파이트클럽>에서 강렬한 영감을 얻은건 맞지만, 이 영화에서 받은 영감은 그 어느 영화에서 보다 특별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그 자체로 거대한 영감덩어리였기 때문이다.
영감을 전달하려는 것 보다는 '영감 자체'를 영상화 시켰다는 느낌을 받았다.
핀처감독의 표현력들을 곱씹어보면 사유하는 인간으로서도, 높은 기량의 감독으로서도, 상당한 지적인 사람인 것 같다.
주인공의 기본설정을 1차원적으로 본다면 그는 퍽 특별할게 없다.
그는 불면증을 달고 다니며 신경쇠약의 직전에서 번뇌의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가 일시적 평온함을 찾은 곳은 우연한 계기로 위장참가한 고환암 환자들의 집단상담 프로그램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극 중 더든이 표현하는 '자기계발이라는 자위행위' 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인의 탈을 쓰고 위선으로 점철되어 살며 마음의 위로마저 위선 속에서 찾아내는 모습이다.
주인공이 내 모습같기도 해서 조금 씁쓸했다. 뭐 다 그런거 아니겠어?
사실 주인공은 피부에 닿는 피상적인 외로움이나 상실감이 아닌, 뼛 속 깊이 기생하고 있는 현대인의 고독감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절대 그의 위선들은 비인간적인게 아니었고 눈쌀이 찌푸려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인간적이고 측은지심이 들기까지 했달까..
여튼 이후 환자모임에서 더이상 위로를 찾지 못하게 된 주인공은 결국 더든을 만나 투쟁, 폭력, 본능을 깨우치고 결국 환자모임과는 반대되는 성격이라 할 수 있는 '파이트클럽'을 창설한다. 폭력이 냅다 난무하는 현장은 생각보다 펑키하고 익사이팅하게 그려진다.
본능에 몸을 맡기고 진정한 해방감에 무아지경이 된 주인공과 참가자들은 마치 계몽가들이요, 클럽은 그들의 회의장이었다.
그 정욕이 그득하고 이를 하나도 숨기지 않은 화면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그대로 그려낸 것 같다.
영화라는 컨텐츠가 가진 기능면에서 이는 최고의 효과를 보여준게 아닐까
어찌나 시원하고 흥분이 되던지...
제 4의 벽
<파이트클럽>이 내면 속 금기를 건드리는 방법은 이는 비단 내러티브 뿐이 아닌 연출의 기법에서도 나타난다.
'제 4의 벽' 이라는 용어가 있다. '무대 위와 관객석, 두 세상을 구분해주는 보이지 않는 벽'이라는 개념이다. 이 벽은 관객들이 극을 극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안전장치이다.
이는 암묵적인 극의 약속인 만큼 깨져선 안되는 금기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영화시장엔 통념에 도전하는 힙한 영화들이 많다보니 이를 깨는 영화들도 더러 보이긴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데드풀」)
<사진출처 : https://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emtae>
<파이트클럽>이 '제 4의 벽'을 부수는 방식은 정말 기상천외하다.
감독의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영화다보니 살아 날뛰는 치기어린 영감의 보따리가 충만하던 시절이었을수도 있다.
영화 자체가 통념에 대한 저항적 자세를 내포하는 만큼 관객을 희롱하는 방식도 아주 도발적이다.
더든은 비누장수임과 동시에 부업으로 영화관에서 영사기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더든은 주인공을 영사실에 데려와 극장 뒷편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저 관객들은 멍청이들이라서 영화보는 화면에 갑자기 뭐가 나타나든 점잔빼면서 아무것도 못본 척 체면치레나 할 것이다' (대사가 정확히 기억안나는데 이런 느낌의 말) 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영사기에 남자의 성기사진을 1초여 정도 투사한다. 그의 예견대로 관객들은 분명히 남근사진을 봤을테지만, 아무것도 이를 못 본척 다시 영화를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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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제 영화의 엔딩시퀀스가 모두 끝나고 <파이트클럽>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1초정도 남자의 성기사진이 나타난다.
굉장히 인상적인 연출이었다. 베르나르의 장편소설 중 하나가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 안에서 또다른 장난을 쳤다는 점이 아주 당돌하고 발칙하기 그지 없다.
영화 속 장치들이 아닌, 영화 그 자체를 도구적으로 활용했다는게 당시에 큰 충격이었다.
우린 참 이상한 때에 만났어.
<파이트클럽>의 싸움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다. 당연한 듯이 바스러지고 소멸해가는 삶에 대한 투쟁이다.
그들의 싸움은 일종의 행위예술일 뿐이다. 현대사회의 테두리 속 상충하는 정욕들을 싸움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그저 표현방식이 은유적 의미의 싸움이 아닌 진짜 '파이트'클럽이었을 뿐.
내면의 화를 여과없이 분출하며, 그들의 내면에 자리잡았을 고독과 응어리를 태우는 작두춤을 춘 것 뿐이다.
작은 바람이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폭력'이라는 1차원적인 화면과 플롯에 매몰되어 보지 않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영화의 최후반부에 결국 더든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모든걸 달관하게 된 주인공의 반응이 퍽 흥미로웠다.
그리고 영화의 끝이자 번뇌의 끝을 갈무리해주는 영화의 엔딩씬.
엔딩씬의 쇼트 자체가 굉장히 묘한 느낌을 준다. 정말...정말 묘하다.... 더이상은 손가락이 아프니 여기까지만.
그리고 엔딩씬에서 주인공은 장면의 묘한 미장센보다도 더 묘하고 이상한 대사를 하며 영화가 끝난다.
"우린 참 이상한 때에 만났어."
<사진출처 : https://blog.naver.com/zephyros0/222878064044>
죽음을 기다려야하는 유한한 삶 안에서, 살아있음을 외치며 어떻게든 존재가치를 빛내려는 우리들은 모두가 불나방들이다.
삶이라는 건 그저 고고한 흐름과 같을지, 맹렬한 투쟁의 역사일지, 난 아직 정답을 모르겠다.
다만 영화를 보고 알 수 있었던 건 죽음은 당연히, 필히 당도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존재가치는 자유의지를 타성으로 가리지 않은 만큼 드러날 것이란 것이었다.
다들 미친듯이 싸워나가길. 터지고 부서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길.
삶이 고난인 건 뒤이어 따라올 해방감을 위한 빌드업이기 때문일수도 있다.
'이케아의 노예'로 살지 지독한 '싸움꾼'이 될지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다.
영화 <파이트클럽> 잡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