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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오 Oct 17. 2022

아현

아현동 언덕길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초등학교, 사실은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서울 고모집에 올라와 며칠 있다 간 적이 있다. 일주일 정도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인데, 여렀을 때 느낌이지 실제로는 두 밤 잤다.


고모부는 유명한 국악인이었다. 생각해보니 당시 집은 마포 아현동 언덕에 있는 조그만 빌라였고, 반지하였다. 꽤나 유명하셨던 분이라 돈을 많이 벌었지 않았나 싶은데, 유명해도 근사하게 사는 것은 극히 일부의 얘기이거나 그가 돈을 엉뚱한 곳에 썼던 것이 분명하다. 후자일 것이라고 본다.


며칠 묵었던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아현동에 찾아가봤다. 처음부터 찾아 가려고 했던 건 아니고, 우연히 마포를 지나다 그 동네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날 저녁. 만취해 밤늦게 집에 들어온 고모가 거실에 구토하는 것을 보았다. 서울의 민요가수 아줌마의 흔한 모습이려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면 가정 문제로 많이 힘드셨던 시기였던 것 같다. 늘 그랬을지도 모르고.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상처를 받은 나는 다음 날 그 집 신발장에 있던 축구공을 들고 근처 중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나름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공차기를 했다. 축구를 많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놀러 온 조카가 아침부터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난리가 났다. 고모는 미안하다며 저녁에 맛있는 식사를 차려주었다.


저녁 식사 후 고모부와 9시뉴스를 봤다. MBC가 11번 채널인 것이 신기했다. 고모부의 지인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와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말아서 피는 담배 같은 것을 말없이 신중하게 즐기고 있었다. 농담으로 나에게 권유해보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감옥살이를 했다.


사촌 동생의 이층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다음날 전주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딱 두 밤 자고 내려왔네. 위 사진의 아현동 로터리와 육교가 기억난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효창운동장과 용산박물관 앞을 지나 반포대교를 건너 고속터미널로 갔다. 서울에 올 때는 설렜지만, 이틀이 지난 뒤에는 빨리 전주에 도착하고 싶었다.


중학교 때 고모댁이 늦은 결혼식을 올려서 - 이유는 모른다 - 다시 서울에 간 적이 있다. 하얏트 호텔 잔디밭에서 고급스럽게 진행되었고, TV에서 보던 유명 국악인들이 그 곳에 있었다. 쓰리랑 부부의 신영희 명창도 있었다. 듣기로는 남편의 잦은 외도 때문에 두 분은 나중에 이혼을 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고모부였던 분은 지금 나의 고모부가 아니다. 몇 년 뒤 사촌동생이 전주의 육군35사단에 입대하는 날 마지막 사제식사를 하기 위해 만난 것이 고모를 본 마지막이었다.


수화기 건너편의 아버지와도 나눈 얘기다. 나는 고모가 어디서 요즘 뭘하실까 궁금하다는 얘기를 했고, 아버지는 몇 년 전 아는 경찰 분에게 신변조사를  부탁해보려 했지만 개인정보 보호 문제로 알 수는 없었단다. 아버지는 다섯 남매 중 넷 째이고, 전라도 김제에 사는 첫 째 누나와만 아주 가끔 연락을 하고 있다. 둘 째인 큰 형은 어렸을 때부터 출가해 혼자 살다가 가끔 아빠에게 돈을 빌리러 찾아오고 또 연락을 끊고 했다. 셋 째가 아현동에 살던 고모이다. 막내 고모는 처녀시절 위에 구멍이 나서 죽었다. 나는 아버지가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외롭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현동 골목을 걷고 있었다. 내가 혼자 공차기를 했던 그 학교가 어딘지 찾고 싶었는데 없어진 것 같았다.


"마을이 개발되서 그런지 그 때 그 집 있던 데가 어디쯤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자, 아버지는 내 집 얘기를 했다. 서울은 아니더라도 경기도 외곽 정도라도 집을 구해 본다면 아버지가 도와줄 테니 잘 알아보라고. 청약도 잘 붓고 있으라고.


"다들 잘 살고 있을까요?"


사실 아현동을 지날 때마다 고모네가 생각난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각난다. 매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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