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아름다운 흉기>
이용, 대상을 필요에 따라 이롭게 씀. 겉으로는 좋은 뜻 같아 보이지만 우리가 사람을 주어로 [이용]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기분이 그렇게 유쾌하지 않다. '필요에 따라'라는 표현에서 덜컥 걸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가. 아니면 이용당하는가.
대부분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처럼 이 책도 제일 하이라이트로 비춰져야 할 것 같은 살인 사건이 처음부터 등장한다. 4명의 운동선수가 자신들의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해 한 남자의 집으로 처들어가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설상가상으로, 그 남자에 의해 만들어진 무기인 '타란튤라'에게 존재를 들키면서 그녀에게서 최대한 도망치려고 몸부림을 친다. 4명의 범인을 쫓는 그녀와 그녀를 피해 달아나는 4명의 범인들, 그리고 그 뒤를 쫓으며 뒷북을 치는 한심한 경찰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이 전개 속에서 나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에게 이용당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먼저 '타란튤라' 그녀는 4명의 용의자를 찾기 위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이용한다. 정말 '4명의 용의자를 한 명씩 찾아서 죽여라'라는 명령어가 입력된 로봇처럼, 사람의 탈을 쓰고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만나는 사람들을 '필요에 따라' 쓴 후에 가차 없이 없앤다. 4명의 운동선수들도 그녀와 다르지 않다. 인간병기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동료를 팔기도 하고, 혼자 도망치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
하지만 4명의 운동선수와 '그녀' 모두 이용당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4명의 운동선수들은 신체적 한계를 뛰어 넘고 명예를 얻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에게 이용당해 약물을 시작했다. 특히 '그녀'는 여자가 임신을 했을 때 나타나는 몸의 변화, 즉 '모성애'를 이용당했다. 물론 4명의 운동선수들은 결국 자신이 약물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고, 즉 자신이 수단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가. 정말 그녀가 원해서 모성애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인간병기로 만든 것일까.
그 남자를 죽인 사람들을 집요하게 쫓아가는 모습만 봐서는 그녀도 범접할 수 없는 신체적 능력을 원했기에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임신한 여자를 보면서 마지막에 들릴 듯 말듯 내뱉었던 그 한 단어를 보면 그녀가 결코 자신의 모성애를 '필요에 따라' 이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축복을 많이 받는 숭고한 과정이, 그녀에게는 그저 괴물을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 실험에 참여하면서 그녀는 단 한 번이라도 허탈함과 무력감, 그리고 인간 존엄성 상실을 느꼈을 것이고 이것을 잊기 위해 기계처럼 단련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무기가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가 얽혀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리의 삶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타인을 이용하고, 나 또한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나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 이 점이 어떤 살인 사건보다도 공포스럽기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제일 후반부에서 언급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