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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yager Jul 10. 2020

비 그리고 대만

비 오면 어릴 적 살았던 대만이 생각나곤 한다 지금도.

어릴 적 초등학교, 중학교를 걸치는

3년에 동안  타이베이에 살았었다.


구글 어스로 검색한,

살던 아파트와 바로 그 앞에는 다니던 중학교,

아파트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고

1층은 가게로 바뀌었지만

학교는 새로 수리해서 깨끗하다. 


수업 시작하는 종소리 듣고 

집에서 아침밥 먹다 뛰어가면 지각 안 했다.


대만은 비가 많이 왔다.

장마가 아니더라도

스콜이 하루에 한 번은 온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몇 년간은

비만 오면 향수병에 걸린 것처럼

대만 생각이 나서 울적해졌다.

하지만,
계속 대만 생각이 날 수 있게

비가 그치지 않기를 바래기도 했다.


지금도

비 내리는 풍경과 빗소리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커피를 마시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즐긴다.

아마 그때 생긴 버릇 같다.


대만에 살았던 시기는

어린이가 청년으로 성장하는 사춘기,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


많이 우울해하고,

삐뚤어졌었고,

여러 가지를 느꼈다.


그 당시 맛 들였던 음식들을
지금도 좋아하고
찾아다니면서 먹고 있는데,

입맛만큼이나

지금의 identity를 만드는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겉돈 중학생


대만 간지 1년 후에

타이베이에서 소위 제일 좋다는
사립중학교에 들어갔다.


연년생 누나는 6개월 늦게, 나는 6개월 빠르게

같은 1학년으로.

9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타이베이 한인 초등학교 조기 졸업하고.


그 중학교는 모든 학생들이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계속 같이 다니고,


고등학교 입시에서는
대부분 3대 명문 고교로 진학했다.

요즘 한국으로 치면

거의 모두 민사고, 과학고에 합격하는 이다.


학교 시스템을 제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일단 교과서는 안 쓰고,

가장 어려운 참고서로 가르치고,


수업시간마다 짧은 수시 시험,

매주 월요일 0교시 1과목씩 주간 고사,

전과목 월말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1. 전과목 평균 60점 이하 유급.

2. 과목 평균 60점을 넘어도

    3과목 이상 평균 60점 이하 유급.

3. 과목 평균 60점 이상 &
    1~3과목  평균 60점 이하이면,
    과락한 과목 재시험을 봐서

    60점 이상인 경우 승급.


한 학년에 10~15% 유급을 했다.

유급을 하면 대부분 공립 중학교로 전학을 가고,

한 반에 1~2명 정도 유급한 학생이 있었다.


입학 당시
그럭저럭 의사소통 정도는 했지만

대만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도 못 읽는 수준에,

절대로 수업을 다 알아듣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첫 월말 시험

국어, 작문은 백지 내고 100점 만점에 8점.

다른 과목은 20~30점, 객관식이 많아서.

영어, 수학은 그나마 점수가 나왔지만,

당연히 반 꼴찌.


공부를 안 한 건 아니었다.

가정교사도 매일 왔었지만

늦도록 공부해도 도저히 진도를 맞출 수 없었다.


열등감 때문이었겠지만

항상 가슴을 뭔가 짓누르는 우울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공부에 별 관심이나 소질 없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많이 놀려 다녔다.


당구, 야구, 농구, 탁구 그리고 담배, 술까지.

자려고 눈감으면 당구대와 큐가 어른 거렸다.


그 당시
나는 자포자기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영어와 수학 성적마저도
낙제 수준으로 떨어졌다.

항상 우울했다. 놀 때 빼고.


공부 습관이 망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꼴찌를 맡아놓고 했지만,

누나는 달랐다.


누나는 출발은 나와 비슷했지만

하루에

밥 먹는 시간 포함해서 1시간 정도 쉬고,

피아노 레슨 받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다.


많이 자면 하루에  4시간 잤으려나?

보통 2~3 시간 잔 거 같다. 밤도 자주 새고.

어머니가 거의 매일 공부 그만하고

자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누나는 계속 성적이 올랐다.

1학년 말에는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그래서, 학교에서

누나는 재시험 없이 2학년으로 승급시켰다.


1학년 말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면

외국인 특혜 안 받고 고입 시험 봐도

3대 명문고 갈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누나는 나에게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교훈을 준 셈이다.


절대 자포자기하면 안 된다는 것.

꾸준히 버티면서 노력하면

그 보답은 언젠가는 온다는 것.


어쨌든, 1학년 마치고

누나는 미국으로 갔고,

나는 불안하기 때문에 감독이 필요해서

대만외국인 학교로 전학 갔다.


부모님이 대만 중학교 계속 보내다가는
자식 잡겠다 싶으셨던 것 같다.
누나 때문이겠지만.



추억의 음식들


당시 놀러 다니면서

길거리에서, 친구 집에서, 학교에서
맛있게 먹었던 추억의 음식들.


타이베이 출장 가면,

비슷한  메뉴가 나올만한 식당을 가면,
그 맛을 찾아다니고는 는데
아직도 못 찾은 맛이 꽤 있다.


코로나 끝나고 타이베이 가게 되면,

아니, 어디를 가더라도
계속 찾아다닐 예정이다.


떠우깐(豆腐乾)- L의 집


간단하게는 두부 말린 것이지만,
아마 대만에는 수십 종류 있을 거다.


맛도 생긴 것에 따라 다른데,
다 개성 있게 맛있다.


중화권 지역에 출장 가서
식당 메뉴에 보이기만 하면,
마트에 들릴 일이 있으면,

떠우깐 찾아봤다.


가끔 비슷한 맛들은 있었지만
내가 찾던 맛들은 없었다.
아마 대만에서만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가장 맛있었던 것은
사각 크래커 크기의 반건조의 도톰한
겉은 고동색, 속은 흰색의 떠우푸깐
돼지고기, 녹두와 같이 볶은 것이었다. 

 

도시락 반찬으로 같이 먹는 것도 좋았지만

L의 어머니가 집에서
금방 만들어 준 것은 정말 맛있었다.  


L과는 특별한 기억이 있다.
친구 몇이서 수업 땡땡이치고,
일주일에 며칠 씩 밖에 나가서 놀다가,
가출은 아니고,
학교에 걸려서 같이 경고를 받았었다.


원래 정학을 받아야 되는데,
관리대상 외국인의 자녀가 껴있어
대만 문교부에서 처벌을 못하게 해서
학교 자체적으로 경고를 줬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다.
 

중국식 물만두(水餃)- W의 집 
 

중국식 물만두는 피가 두껍고
소는 주로 돼지고기, 한국과 비숫한가?


시꺼먼 중국 식초에 찍어 먹는데,
맛은 한국식과 많이 다르다.

난 중국식을 더 좋아한다.


요즘 한국에서도
중국식 중국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여기에 맛을 들인 건
친구 W의 집에서

만두피 만들고, 만두 빚고
직접 만두 만들어 먹은 다음부터였다.


W 집에 가면
어머니가 가끔씩
만두 빚을 재료 가져오시고,
W, 나중에 스튜어디스가 된
내 눈에 미스 타이완급이었던 여대생 W의 누나들과
같이 만들어 먹었다.


W 역시 키 크고 잘생겨서
내 누나 친구들이 관심이 많았다.
공부만 하던 누나도

그 친구에 대해 물어봤을 정도로.


연예인이 될 재목은 뿌리부터 달랐다.


양춘면(陽春麵) - 대만 서민의 면


친구들과 놀다가
배고프면 자주 사 먹던 면. 싸니까.


면과 청경채를 같이 삶은 후에
돼지고기 육수를 붓고,
먹을 때는 고추기름으로 간을 맞춘다.  


국물에서 돼지 냄새가 나지 않아야
잘하는 집이다.


서울 딘타이펑에서도 팔았는데
맛있게 잘 만든다.  
요즘은 메뉴에서 빠진 것 같다.


논외 얘기인데,
요즘 고추기름은  
기름과 고추의 비율이 5:5 정도이면
그때는 고추 9, 기름 1이었다.
서민 고추기름이라 그런가?


외국인 학교로 전학한 이후.

집 앞에 고등학생과 갓 군제대한 형제가
포장마차를 차렸다.  

거기서 양춘면 사 먹으면 단골한테는

사케의 대만 버전인 쌀술(米酒) 한 컵 주곤 했다.

(대륙의 쌀술은 한국 감주+막걸리, 그래서 달다.)

 

거의 매일 밤 10시쯤 포장마차 가서
양춘면 먹고, 술 마시고 1~2시간 놀았다.

동네 껄렁한 청년들이 자주 모였는데,   
외국인 학교 다녀서 머리가 길어
중학교 2학년인 줄 알고도 껴줬다.

당시 대만 중고생은 스포츠머리.


그 시기 외할머님이 대만 집에
6개월 머무르셨는데,
내가 아버지한테 혼날 때마다
아버지가 너무 심하다고 뭐라 그러시고는,
돈을 쥐어주시고  나가서 양춘면 사 먹으라 그러셨다.


양춘면은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추억하는 면이기도 하다.


우육면(牛肉麵) - 대만 대표 면


한국에서 평양냉면 맛이 집집마다 다르듯이,

대만에서도 우육면의 맛은 종류가
수십 가지는 되는 듯하다.


탕의 맛을 내는 재료 따라서,
국수 면발의 종류에 따라서
맛이 다양하게 나온다.


요즘 한국에서도 우육면 좋아하는 사람 많은데
한국은 여러 가게의 맛이 다 비슷하다.
딘타이펑이건 어디건.


보통은 붉은색 국물에 보통 크기의 면발인데,

내가 좋아하는 건 고동색 국물에
수타면 면발이다.


요리를 잘 몰라서
어떻게 국물을 내는 건지는 모른다.


외국인 학교 다닐 때
좋아하던 스타일의 우육면 가게에서
물만두에 사천식 김치와 우육면을 많이 먹었다.

하교길에 스쿨버스 내리자마자 직행했다.


워낙 자주 가니까 외상으로 먹었는데,

귀국하기 전에 도저히 갚을 방법이 없어서
친구들한테 돈 빌리고도 모자라,

이실직고하고 돈 타내서 갚았다.


요즘에도
가끔 대만에 출장 갈 때는
거리 돌아다니다 우육면 가게 들어가서

먹어 보고는 하는데,

아직 옛날 맛을 내는 가게를 찾지 못했다.


중국 파전(葱油餅) - Everywhere & Nowhere


중국식 파전은 정말 흔한 음식이다.
웬만한 중국식 중국식당에는 다 있다.

한국에서도.


맛은 다 대동소이하다.
그저 그렇다는 의미.

밀가루에 파 촘촘하게 썰어 넣고
구워서 만드는 건데
별로 특이할 것도 없고,
그냥 인도음식 란에 파 넣은 맛이다.

하지만 내가 찾는 것은
길거리에서 파는 대만식 파전.

파전에 고추기름 발라서 굽고,
고추기름이 전 안으로 퍼지면
다시 고추기름 발라서 굽는데,
3~4번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면 매콤하고 고소한 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출장 가면
길거리 구경하면서 찾아보지만,
아직도 찾지 못했다.


출출하면 많이 사 먹었다.

당시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하교 시에
귀가 방향이 같은 학생들 별로
운동장에 3열 종대쯤으로 모아서
특정 지점까지 줄지어 내보냈는데,
선생님들이 방향별로 인솔했다.

대만 중학교 초기에
귀가 줄에서 빠져나와
중국식 파전 사 먹다가
인솔 선생님한테 걸려
학생들, 행인들 보는 자리에서
귀싸대기 몇 대 세게 맞았다.


맞을 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참 brutal 하기는 하다.

 학교 아직도 엄격해서,
타이베이 학부모들의 first choice라고 한다.


동과차( 冬瓜茶) - 콜라보다 좋았던 음료


동과라는 열매(과일)에
흑설탕 넣어 만든 음료라고 하는데,


대만의 더운 날씨에
땀 흘리면서 운동한 후에,
걸어서 집으로 오는 길에,

차게 만든 동과차
길거리에서 많이 사 마셨다.

달달하면서 고소한 맛.
콜라나 주스보다 더 좋았다.


길거리의
중국식 파전과 정말 좋은 궁합이었다.


최근 한국에 진출한 대만 샌드위치,
홍루이젠에서 작년부터 동과차 판다고 하는데
아직 못 가봤다.

어린 시절 대만에서 먹었던
많은 음식들이 기억에 남지만,
三明治(삼명치), 샌드위치는
별로 였다는 인상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있다가
집에서 가까운 홍루이젠 찾아서
동과차 마셔봐야겠다.


그리고
방금 동과차 켄, 온라인 주문했다.

한국에서 동과차 파는 것,
이 글 쓰면서 동과차 검색하다 처음 알았다.

옥수수 구이 - 독특한 별미
 

옥수수가 다 거기서 거기 지만
대만 겨울에 길거리에서 파는
옥수수 구이는 좀 독특했다.

익은 옥수수를
고추기름 발라서 숯불에 굽고,
다시 간장, 어떤 간장인지 모른다,
발라서 굽고


그 후에도
고추기름, 간장 바르기를 반복하는데,
기술은 태우지 않고 굽는 것이다.


짜고, 맵고, 고소한 맛이 동시에 나는데
날씨가 쌀쌀한 겨울철의 별미였다.


요즘은 겨울에 대만을 가본 적이 없어서,
아직도 길거리에서 파는지는 모르겠다.

핫도그


이건 대만 음식은 아니지만
대만 시절 좋아하게 된 음식이다.


여름 방학이면 살다시피 했던
타이베이의 멤버십 수영장에서,

출출하면 햄버거, 핫도그, 피자 중의 한 가지

시켜 먹었다.


수영장에 붙어 있는 양식당 세프가

낮에 수영장 오는 사람들한테

만들어 주는 것이어서 맛이 좋았던 것 같다.


비슷한 맛의 햄버거, 피자는 있었지만
그 핫도그 맛은 찾을 수 없었다.


핫도그 빵을 찌고,
살살 녹는 부드러운 소시지를 삶아서
연한 칠리소스만 뿌려서 먹는 것이다.  
피클, 양파, 할라피뇨 같은 것들 토핑 안 하고.

이 핫도그 맛은 미국 유학 시절
공부하던 대도시에서도 찾기 힘들었다.
 food court 핫도그 전문점에서도,
시내의 식당에도 없었다.


그러다가,
뉴욕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출근할 때
전철역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걸어가는 중간에
카트에서 파는 핫도그에서 그 맛을 찾았다.


아침에 출근할 때 두 개씩 먹곤 했다.
콜라 포함해서 1분이면 다 먹었다.


한국에는 핫도그 가게 자체가 적고,
그래서 그 맛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가끔 나처럼 핫도그 좋아하는 사람이
차린 가게도 있었는데 금방 없어졌다.
한국 사람들 입맛에 안 맞는 건지도 모른다.


사족이지만,

몇 년 전 어떤 기업이 청담동에 크게 차린 핫도그 전문점.

핫도그를 욕되게 한다고 느꼈다.


가끔은 핫도그에 사명감을 가진 내가
나중에 가게를 직접 차려볼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빵, 소시지, 소스 다 내가 직접 만들고.



Epilogue


몸으로 배우 외국어


중국어와 영어에 투자한 시간을 따지면
영어가 중국어의 천배쯤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아직도 중국어는 의식하지 않아도 들리고,
영어는 신경 써야만 들린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할 수만 있다면
외국어는 외국어만 쓰는 환경에서 배워야 한다.
하루 종일.


중국어는 중학교 들어간 지 3~4달 만에
그냥 자동적으로 책이 읽히고 글이 쓰였는데,
나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단어를 따로 외운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대만에서 외국인 학교 다녀도
영어는 거의 늘지 않았다.
중국어 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 아이들과 중국어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학교 1년은 낭비였는데,

귀국해서 영어 문법을 배우고 나서야
영어의 개념을 잡을 수 있었다.


누나


누나는 미국에서 공부한 이후
그 잘하던 중국어를 다 잊어버렸다.
영어로 대체했다고 할 수 있기는 하지만.

누나는 눈앞의 현실에 최선을 다한 듯하다.
나처럼 대만을 잊지 못해,

중고교 시절 명동의 대만 서점에서
잡지, 소설 사다 읽는 시간낭비 안 하고.


누나는 얼마 전 타이베이 여행을 다녀왔는데
인상이 안 좋았다고 한다.
낡고 우중충하고 지저분한 느낌도 들고.

"우리 살 때는 좋지 않았니?" 그런다.


난 타이베이 가면
우선 운동화에 반바지 갈아 입고
살았던 집,
집 앞에 붙어있던 중학교부터 가본다.

그리고 추억이 깃든 장소들 돌아보고
길거리의 가게에 들어가
추억의 음식 사 먹는다.


누나와 나를 비교하면,
역시 남자는 사랑을 못 잊는 것 같다.  

아니면 누나의 사랑은 미국이던지.


떠우깐 친구 L

 

친구와 헤어진 지 20여 년 만의
대만 첫 출장길에
전화번호부 뒤져서 친구 집에 전화했다.


L은 거의 집에 거의 붙어 있지 않는다는데,

출장 갔다 피곤해서 집에서 쉬고 있다가
내 전화받고는 내 한국 이름을 부른다.


다음 날 밤 호텔 라운지 바에서 만났다.
크지 않은 건설회사 하는데
최근에는 필리핀으로 진출해서
필리핀 출장 갔다 온 것이라고 했다.


그다음부터 L이 끌고 가
새벽까지 술 마셨다.

"小色狼, 요즘 대만 꾸냥 봐야지" 그러면서.

小色狼, 번역하면 '꼬마 호색한' 쯤 되려나?
친구들보다 1살 어린 내 별명이었다.


처음은 클럽.
나처럼 반바지 입고,
더욱이 아저씨들인데도 들어갈 수 있었다.
대만은 그런가? 아니면 L이 단골인 건지.


그다음은 다른 곳으로 옮겨서
더 private 하게 마시고 전사했다.

같이 다녔던 XX학교 출신들이
대만에서 "XX방"이라고
정재계에서 밀어주고 끌어준다 던대,
L은 못 꼈다.
2학년 때 유급해서 전학 갔으니까.


중국식 물만두 친구 W


내가 한국 돌아오고 나서

W가 고등학교 입시 떨어질 때까지
1년 넘게 편지 왕래했었다.


대만을 이어주는 끈이었고,
나는 비 오면 고향처럼 대만 생각난다고
편지에 썼던 것 같다.  


유학시절, 대만 유학생들이 읽던
연예 잡지 뒤적거리다
이 친구 사진이 보여서 뒤로 자빠졌는데,
이미 유명한 가수가 되어 있었다.

대만 출장 시에,
당연히 전화번호부에 이름 안 나와 있어서,
W 누나한테 전화해서 안부 전해달라 그랬다.

노래는 W보다 이 누나가 더 잘 불렀었다.


W는 내 유학시절부터 계산해도

지금까지 오랫동안 중화권에서 인기를 이어간다.


요즘에도
10억 명쯤 보는 중국 구정 프로그램에 나오고,
TV에 싸이와 같이 나온 것도 유튜브로 봤다.  


나중에 인기 사라지고 평범해지면
대만 갔을 때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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