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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덕분에 풍요로워진 내 삶

성인이 된 제자들과 만난다는 것

by 정생물 선생님

내 입맛에 딱 맞는 음식과 커피, 새로 알게 된 좋은 노래, 뮤지컬 및 전시회 관람, 초록초록한 장소, 야경이 좋은 곳 등등 - 이런 것들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진짜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1순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물건이나 장소 행동 등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무기획을 하면서 많이 느끼기도 했는데 교무기획이라는 자리는 업무가 많아 요즘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나는 그 자리의 무게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7년 차 때 처음 하게 되었다. 그렇게 2년을 교무기획을 하면서도 (그때는 물론 힘든 일이 있었겠지만) 주변 선생님들이 잘한다고 칭찬해 주시고, 수능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다들 말없이 도와주셔서 감사했던 기억. 그리고 교무기획 2년 하고 나니 학교에서 이제 못할 업무는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하지만 다음 학교에서 4년간 맡은 연구기획, 평가, 교무기획, 자연기획은 업무 강도만 보면 괜찮았지만 뭔가 주변 선생님들이 나랑 잘 맞지 않아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장학사가 작년에 많이 선발되지 않아 올해 1학기 추가 시험 느낌의 장학사 선발 관련 공문이 왔다. 예전의 나라면 이제 시작해 볼까 했겠지만 이제 장학사 시험은 절대 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물론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ㅋㅋㅋ 왜냐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들 중에 제자들이 엄청나게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장학사가 되면 더 이상 같이 수업하고 생활하는 제자들이 없어지는 건데 그건 못 참지 ㅋㅋㅋ


시간이 흘러 내가 쌓은 점수로 교감, 교장이 된다면 모를까 장학사는 방학도 없고, 제자들도 없고, 왜 해야 하지 하는 생각 ㅋㅋㅋ 아직 애들도 좋고, 수업하는 것도 재밌어서 이럴지도 모른다. 50대가 되어 의욕이 없어진 정선생이 된다면 지금 생각을 후회할 수도 있겠지 ㅋㅋㅋ


좋은 사람, 그러니까 나와 결이 맞고 다정다감한 말을 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그런 시간들로 위로받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제자들과 좋은 기운을 주고받는 시간, 재학생 때는 그때 대로 소중한 시간이며 졸업을 하고 같은 성인으로 특히나 직장을 가지고 만나게 되면 직장생활, 연애, 잘 모르는 정치 이야기 등등 같은 성인으로서 하게 되는 생각을 공유하면서 또 다른 풍요로운 시간을 보낸다.


선생님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 수많은 아동 학대 등의 사건, 시험 문제에 대한 민원 등으로 이 시대의 많은 선생님들이 힘들어한다. 내 수술 집도를 맡은 교수님도 내가 고등학교 교사인 걸 알아서 내 진료를 볼 때 처음 하신 말씀이 “요즘 선생님 힘드시죠?”였지. 나는 “아 괜찮습니다. 할만해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잘나서 민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아도 그런 사건은 교통사고처럼 올 수 있다는 걸 주변 선생님들 보면서 느끼기 때문이다.


나도 아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도 많고, 힘들 때도 많다. 하지만 그 어느 직업에서도 느낄 수 없는 좋은 감정도 많이 느낀다. 아직 미성년자인 아이들의 삶을 어루만져 성인이 되어 각자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일. 그 과정에서 내 삶도 함께 풍요로워진다는 걸 안다. 아이들과 함께 하며 풍요로운 삶을 19년째 살고 있다. 남편만 있으면 50대에 명퇴한다 - 입버릇처럼 한 이야기지만 남편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런 삶의 기회를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 어떻게든 건강하게 정년까지 아이들과 잘 소통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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