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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식 Jan 05. 2022

나의 길을 내다


"...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 1편)


인생은 길이다

   인생은 길이다. 누가 그 길을 내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걷고 있지만 그 길 밖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약에서 종종 죽음을 조상의 길을 따라갔다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길이라고 했다. 길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인생을 일컬었다고 할 만큼 인생을 닮았다. 시편 1편에 두 가지 길이 나온다.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이 그것이다. 두 길의 생김새는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기도 하다(잠 14:12). 그러나 그 길의 종점은 완전히 다르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절). 누구나 이 두 길 중에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의인들의 길을 걷고 싶을 것이다. 의인들의 길은 1절의 표현으로 말하면 복 있는 사람의 길이다.


1. 도시의 길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많은 길들을 걸어봤다. 이 시에는 그가 다녀본 많은 길들이 담겨 있다. 1절을 보면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안주해서 살아가는 도시의 길을 걸었다. 내가 도시의 길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라는 표현 때문이다. 도시의 길은 위험하다. 도시에 들어설 때면 누군가가 내 가방을 낚아채 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옷고름을 단단히 하게 된다. 나를 갈취하고자 하는 악인들의 꾀는 어디에든 도사리고 있다. 도시의 어두운 골목은 늘 위험하다. 그 골목을 서성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한 꾀를 이루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그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그렇다면 환한 길은 안전한가? 네온사인으로 화려한 도시의 넓고 환한 길은 더 무섭다. 화려한 건물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 많다. 마치 도시의 입구인 기차역에서 악인들의 꾀를 겨우 피했고, 죄인들의 길과 같은 골목길을 피해 안전하다 싶은 호텔에 들어왔는데 그 호텔에서 강도를 당한 것과 같다. 시인은 그래서 도시에는 안전한 길이 없다고 말한다. 도시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 위에 생겼다. 그리고 도시로 더 많은 길이 나오고 들어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그 도시에서 더 악해진다.


2. 시냇가 길

   시인이 걸은 두 번째 길은 3절에 나온다. 시인은 그 위험한 도시를 벗어나 전원을 지난다. 그 길은 시냇가를 따라 나 있다. 시냇가를 따라 나 있는 길은 안전하다. 먼 여행길에 생명과 같은 물을 언제든 마실 수 있으니 텀블러에 물을 담을 필요도 없다. 짐은 한결 더 가볍다. 사람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시냇가를 따라 걷다 보면 동물들도 물고기들도 쉽사리 볼 수 있다. 이제 시인의 발이 피곤하다. 어딘가에 잠깐 쉬고 싶다. 도시에서는 길에서 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시냇가 길에는 쉴 곳이 있다. 아주 큰 나무가 시냇가를 지키듯 서 있다. 잎은 푸르고 풍성하며 열매들로 가지가 무겁다. 많은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어 있어 즐거운 노래가 들린다. 그 나무는 그곳에 오래도록 있다. 그 둘레와 드러난 뿌리줄기들을 보니 몇 백 년은 된 것 같다. 어쩌면 이 시냇물이 흐르면서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간 얼마나 많은 여행객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더위와 추위를 피했는지를 닿고 달은 나무 밑동이 보여준다. 시인은 이 나무가 어떻게 이렇게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3. 황무지 길

   시인이 걸었던 세 번째 길은 4절에 나오는 황무지 길이다. 시냇물이 그치는 산을 넘어 황무지 길에 접어드니 벌써부터 입이 마른다. 마른바람이 옷을 칭칭 감은 몸을 파고들어 피부에 남아 있는 모든 수분을 가져가는 것 같다. 뜨거운 햇볕은 머리에 둘러쓴 두건을 뚫고 들어온다.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죽은 것처럼 잎사귀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고목이라도 크다면 그늘을 만들 텐데 얼굴이라도 가릴 그림자를 찾기가 어렵다. 뜨겁고 마른 모래바람 속에 시인의 눈앞에 멈추듯이 겨가 지나간다. 그 언젠가 이곳에도 곡식이 자랐다는 것이다. 시인은 왜 이곳이 황무지가 되었을까 궁금해하며 어서 해가 지기를 기도한다. 해가 지자 선선해져서 살 것 같다. 하지만 이내 몰려드는 추위를 피하기가 어렵다. 황무지의 밤은 낮만큼이나 위험하다. 이 추위를 밤새 체온만 의지해서 버텨야 한다.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이 길은 사망의 길이다. 낮에 죽어도 밤에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망의 길이다. 낮에도 밤에도 결코 안전하지 않은 사망의 길이다. 이 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낮의 해와 밤의 달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4. 내 인생의 길

   황무지 길에서 구원을 경험한 시인은 지나온 길들을 떠올렸다. 도시 길들을 도망치듯이 나와서 다다른 시냇가 길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그 길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는 그 길로 돌아가 다시 걸을 시간이 없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처럼 느꼈던 황무지 길은 얼마나 위험했던가? 그 길에서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그가 결코 살아 나올 수 없었다. 그 길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는 이미 있는 길들을 걸었다. 그런데 그 길들을 떠올려보니 그는 자신의 길을 걸은 것이었다. 그가 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만의 길을 만들었다. 그는 그의 걸은 길들에 대해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 길들을 되돌아가 다시 걸을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그 길들을 걷게 될 사람들에게 먼저 걸은 순례자로서 도움이 될까 싶어서 글을 쓰는 것이다.


길들을 걸으며 나의 길을 내다

   인생들은 누구나 길들을 걸으며 자신의 길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있는 결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 길들을 그저 묵묵히 걷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의 짐이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들이 가진 궁극적인 불안은 이 길의 끝이 어디냐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길의 끝은 지금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인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안전한 길을 걸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유혹에서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유혹에서도 도망쳐야 한다. 시냇가 길에서는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만 채울 것이 아니라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도 채워야 한다. 그래야 황무지 길을 걸을 힘을 얻는 것이다. 황무지 길에서는 이 고통의 길에서 구해달라고 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건강해도 낮의 해와 밤의 달을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이 세 가지 길 중에 어느 길을 지금도 걷고 있다. 각각의 길이 다르더라도 우리에게 변함없이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달리 말해 무엇이 우리로 그 모든 길들을 걸을 수 있게 만드는가?


   그 첫째 답이 2절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인은 시냇가 길에서 만난 나무를 기억한다. 그 나무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가? 어떻게 여전히 푸르고 과실을 맺는가? 어떻게 그 자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내어주는가? 그것은 바로 시냇가의 물 때문이다. 그 나무는 말할 것이다. 이게 다 이 시냇가의 물 때문이라고. 나는 그저 그 물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기만 했다고. 신자의 삶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신자의 삶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삶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 두 번째 답은 6절이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인은 길을 걸을 때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말한다. 앞선 내용은 매일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리고 6절은 그 길의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이 도시에서 나온 이유도, 시냇가 길에 눌러앉지 않은 이유도, 황무지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도 동일하다. 그것은 그가 여호와라는 목적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자의 길은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아골 골짜기도 있고 빈들도 있다. 거기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다. 그러나 신자는 그 길을 가로질러 간다. 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길을 지나서 여호와께로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지나셨다. 그 길 끝에 부활이 있어 그 십자가의 길이 영광의 길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걷고 있는 길에서 어떻게 한 걸음을 떼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길에서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또 다른 한 걸음을 땅에 디딜 힘을 준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여호와의 산을 향해 눈을 든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 것이고 우리의 길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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