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가난한 자가 어떻게 복될 수 있는가? 소유로 복을 삼는 세계관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복되다는 것은 상태를 말하며 상태는 소유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소속되었는가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요즘은 브랜드 가치라는 것을 돈으로 계산한다. 한 기업이나 나라의 브랜드 가치는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에서 다수에게 얼마나 알려졌느냐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 아주 작은 기업이나 나라라도 브랜드 가치는 높을 수 있다. 이러한 브랜드 가치는 가치를 재창출한다. 한 제품에 그 브랜드를 붙이면 그것으로 그 제품의 가치가 커지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그들이 복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소유 때문이 아니라 소속 때문이다. 아무리 가난한 자라 하더라도 그가 천국을 소유하고 있다면, 달리 말해 그가 천국에 소속되어 있다면 그는 참으로 복된 자이다. 천국이라는 브랜드를 가진 자라면 세상 어떤 브랜드의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자이다. 소속이라는 상태가 소유라는 가치보다 더 실질적이라는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는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무능한 존재이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할 수 없는 가난한 자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부모의 손에 있다면 그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서 가난하다는 상태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가난은 본인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절대 부족과 절대 무능력의 상태이다. 경제적 가난에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래서 혹자는 그중에 아주 단순한 표면적 이유를 들어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정죄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 가난조차도 실은 사회적 구조나 폐단이 큰 원인을 차지한다. 가난의 이유를 막론하고 가난하다는 상태는 절대 부족과 절대 무능력의 상태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파산한 상태를 말한다. 외부로부터 구원이 아니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회생 불가능, 회복 불가능의 영적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마태복음 15장 21-28절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도시인 시로와 두로에 머물 때 일이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한 가나안 여인이 도시 근교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다. 얼마나 간청하던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계속 울어서 시끄러우니 제발 보내달라고 할 정도였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럼에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간청한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즈음되면 예수님께서 그 간절함에 도와주실 만도 하신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은 정이 떨어질 정도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개라는 표현에 나라면 불끈하고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가나안 여인은 정말 대단한 대답을 이어간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결국,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시며 그 소원을 이뤄주신다. "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자신의 영적 파산을 자각하고 있는 자의 모습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개"라는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너에게 줄 떡이 없다는 선고를 받아도 간청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떤가? 우리는 진정으로 가난한 자가 아닌가? 예수가 없으면 결코 살 수 없는 가난한 자, 우리와 구원과의 거리는 당시 예수님과 이방인의 거리보다 더 멀지 않은가? 우리가 가진 소유나 위치가 우리 구원에 무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우리는 부도난 수표 한 장을 손에 달랑 들고 혹시나 파산을 면할 수 있을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파산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