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라이딩 전날이 주는 묘한 설렘이 있다.
출퇴근 길을 살짝 벗어난 정도의 거리지만 해외여행을 떠날 때 느낄 수 있는 아드레날린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꽤 가성비가 좋아 보인다.
토요 출근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운이 좋게 그 화살을 피할 수 있었고,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 화살에 잠시 올라타 보기로 했다.
철원이나 한번 가볼까?
집에서 속초를 다녀온 덕분인지 이제 150킬로 내외 거리는 그냥 맘만 먹으면 바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은 참 상대적이다. 단순하기도 하고.
4시 30분에 출발해서 페달을 힘차게 돌린다. 습하고 더운 바람이 어느새 달아나고 건조하고 냉랭함이 옷깃을 스친다. 1년 중 개인적으로 제일 꺼려하는.. 가을 타게 만드는 날씨의 초입이다. 이른 시간에 라이딩을 즐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1시간 반 동안 38킬로를 달려 M을 만나 본격적으로 북쪽을 향한다.
도봉구, 의정부, 동두천, 연천 그리고 철원 노동당사까지 북위 탐험길이다.
8시가 넘어서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으로 보급을 한다.
지리산 너구리 한 마리가 어젯밤 소주 한 병의 숙취를 말끔히 해치워준다. 고맙다.
한강 라이딩만큼 깔끔한 길을 찾기 힘들다는 것을 이번에도 절실하게 느낀다. 보기에 좋은 길이 달리기엔 아주 별로다. 칠해놓은 페인트가 들고일어나서 울퉁불퉁해진 노면이 로드 자전거를 사정없이 흔든다. 엉덩이로 흡수된 진동이 척추와 등, 어깨와 목, 손목까지 여실히 전해진다. 이럴 때마다 아스팔트가 그립다.
소요산까지는 평화누리길로 오다가 소요산부터는 공도로 달린다. 앞서 가는 4명 팩 뒤에 붙어서 신나게 달린다. 도로 통행에 최대한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면서 달리고 있는데 웬 흰색 마티즈 한대가 신경질 가득한 클랙슨을 울리며 지나간다. 자전거도 도로에 달릴 때는 째뜬 차량이고, 저속 주행을 하고 있다면 잠시 1차로로 차선 변경해서 지나가면 될 것을 왜 저러는지 마음이 씁쓸해진다.
어느 것 연천 전곡리를 지난다. 구석기시대 유물 유적이 있는 곳이라고 국사책에서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텍스트로 봤던 곳이 눈앞에 나타날 때 내 몸은 닭살로 환영하곤 한다. 감동의 순간을 기억하고자 굳이 렌즈를 꺼냈다.
들판에 곡식들이 누렇게 익어간다. 곧 추석임을 알려주는 기분 좋은 징표다.
다시 등장한 평화누리 길이다. 달리다가 자전거 도로 한가운데에 똭 자리를 잡고 있는 뱀 한 마리를 보곤 기겁했다. 하마터면 밟고 지나갈 뻔했다며 한 숨을 돌리다가 밟아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며 푸념을 던지던 중 자전거 커뮤니티에서 아주 뱀과 관련된 유명한 글이라며 M이 소개해 준다. 뱀을 미처 못 보고 자전거로 밟고 지나가게 되었는데 뱀이 뒷바퀴 스프라켓에 말려들어가서 라이더의 엉덩이를 채찍처럼 때리게 되었다나 어쨌대나... 과장한 심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자전거 커뮤니티에 가보니 그 글이 있었다. 뒷바퀴에 돌돌 말려있는 뱀 사진도 함께 ㅎㄷㄷ
아침엔 추웠는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독차지한 태양이 마음껏 자신의 기량을 뽐내자 슬슬 얼굴과 몸은 뜨거워지고 목은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4시 반부터 라이딩을 시작해서 140여 킬로미터를 달려오는 동안 한 번밖에 쉬지 않았던 피로가 더해지니 다리가 점점 통나무로 변해간다.
드디어 철원 초입, 마지막 관문인가 싶은 아주 정~~~ 직한 업힐이 보인다. 스키점프 대처럼같이 생긴 아주 먹음직스러운 업힐이다. 눈으로 보기엔 평지로 가다가 마지막에 깔딱 업힐인 것처럼 보이지만 평지처럼 보이는 길이 3~5도 정도의 업힐이다. 깔딱 업힐은 평균 13도라 와리가리는 이럴 때 하라고 만든 방법인가 싶었다.
역시 업힐의 끝엔 '뷰'라는 보상이 함께한다. 이 고개를 새우젓 고개라고 하는데 예전 임진강, 한탄강을 타고 이동해온 새우젓 장수들이 이곳을 통해 철원까지 넘나들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철원을 넘나들 수 있는 주요 통로였기에 일제 강점기나 해방 이후에도 중요한 사건이 이곳에서 종종 벌어졌다고 했다. 이곳에서 바라본 철원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던 일반적인 강원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렇게 넓은 곳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의 넓고 평평한 지형에 감탄하고 있을 때쯤 M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도로 보면 철원이 한반도 한가운데에 있고, 철원평야가 유명해서 쌀이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며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수도이기도 했다는 그의 얇은 백과사전 식의 설명을 들으니 그동안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았던 철원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불렀던 '발해를 꿈꾸며'에 등장했던 노동당사가 드디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량한 곳 뼈대만 남은 앙상한 모습을 기대했던 나는 관광지 느낌이 물씬 나는 노동당사의 모습이 자못 실망스러웠다. 앞에 쳐져있는 검은색 울타리도 별로고.
노동당 사는 1946년에 북한 인민군이 철원 인근 지역을 관장하고 수탈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라고 한다. 1950년 6.25 전쟁 이후에 남측이 이곳을 접수하면서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저렇게 사연이 있는 건물을 보면 가까이 가서 잠시 온기를 느껴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벽을 어루만지고 있으면 지금 이 순간과 그때가 잠시 '연결'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울타리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으니 먼발치에서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소요산까지 다시 돌아가서 지하철을 타고 복귀하는 계획이었으나 도저히 왔던 길로 다시 40킬로 라이딩을 할 힘이 없어서 철원 시내에 있는 동송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타고 강남터미널로 돌아왔다. 5시간을 꾸역꾸역 페달을 돌려 갔는데 올 때는 2시간, 그것도 차가 밀려 그 정도다. 복귀 라이딩까지 하면 성취감이 더욱 크겠지만.. 일단 좀 살자. 그래야 다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