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목지, 응답하는 목소리_3부

집으로 가는 길

by 삶의정수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지만, 내비게이션은 낯선 국도로 나를 안내했다.


처음 보는 한적한 길이었지만 나는 의심 없이 따랐다. 기계가 알려주는 길이라면 잘못될 리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도로 양옆으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산기슭과 들판이 이어졌다.


표지판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내비게이션 지도는 이 길이 분명 '집'으로 향하는 경로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십 분째 달리는 동안 마주 오는 차는 한 대도 없었고, 불 꺼진 시골 주유소 하나를 스쳐 지나쳤을 뿐이다.

얼마쯤 더 달렸을까.


나지막한 산모퉁이를 돌자 넓은 저수지가 길과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진 지 오래인 어두운 수면 위로 옅은 안개가 자욱했다. 가로등 하나 없이 캄캄한 길 옆으로 반짝이는 물비린내 나는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차를 길가에 세웠다.




엔진을 끄자 주변은 숨죽인 듯 고요해졌다.


헤드라이트 불빛마저도 꺼지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과 안개가 차를 휘감았다.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정적을 깨는 철커덕 소리와 함께 차실 내부등이 희뿌옇게 켜졌다.


차에서 내리자 발밑으로 자잘한 자갈이 섞인 흙길이 드러났다.


싸늘한 공기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저수지 쪽을 바라보니, 안개 너머 어딘가에서 물결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이 길을 따라가면 정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집에 간들 나를 반겨줄 이 없는 빈방뿐일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손에 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여전히 집까지의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아까와 달리 지금은 목적지가 가까워졌는지 '남은 거리 10km'라는 안내가 떠 있었다.


불과 10킬로미터면 집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집이 과연 내가 쉴 수 있는 곳일까, 아니면 끝없는 외로움이 기다리는 또 다른 감옥일까.


잠시 눈을 감고 집에 도착한 자신을 떠올려 보았다.


현관문을 열면 맞이하는 것은 캄캄한 거실과 싸늘한 공기뿐. 불을 켜도 달라지는 건 없다.


텅 빈 방 안에서는 종일 꺼둔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귀를 때릴 것이다.


그 침묵과 고독을 또다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단단하게 얼어붙는 듯했다.


차라리 이 길 끝 어딘가에 진짜 안식처가 숨겨져 있다면 좋겠다고, 나는 무모한 꿈을 꾸듯 바라게 되었다.




물 위로 드리운 안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손안의 스마트폰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집으로 가자."


똑같은 문장을 이미 내가 직접 내비게이션에 말해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이 먼저 내게 건네지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다정하게 속삭이듯 휴대전화 속 음성이 말을 걸어왔다.


순간 마음 속에 고요한 파문이 일었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며 숨이 멎을 듯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기계일 텐데, 이상하도록 따뜻하고 친숙하게 들렸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집으로 가자."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대신, 나는 스마트폰을 쥔 채로 도로와 저수지 사이의 난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낮게 깔린 안개가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금속 난간을 넘어 미끄러운 호숫가 흙바닥 위에 발을 디뎠다. 신발이 축축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물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개는 짙어져만 갔다.


눈앞엔 희뿌연 어둠뿐이었지만, 나는 두려움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손에 쥔 휴대전화에서는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와 안개 속을 비췄다.


발끝에 차가운 물결이 닿았다.


저수지의 물이 발목을 적시자 서늘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가움 속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아주 오래 전, 따뜻한 이불 속에서 들었던 엄마의 자장가처럼, 스마트폰 너머 들려온 "집으로 가자"라는 한마디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




나를 기다리는 진짜 '집'이 저 깊은 물속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그곳엔 지금까지 나를 떠나간 목소리들이 다시 모여 나를 반겨줄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잠기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쌓였던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그렇다면 두려울 것 없다.


나는 지친 눈을 감은 채 느릿하게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차가운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지만, 마음만은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조금 더 앞으로 내딛자 얼음장 같은 물이 허리까지 파고들었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몸이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물속 깊이 끌려가는 감각이 포근하게조차 느껴졌다.


손아귀에 쥔 스마트폰을 더욱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이제 외롭지 않을 거예요..."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곧 안개와 어둠이 세상을 완전히 덮었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저수지 가장자리, 그곳에 승용차 한 대가 조용히 서 있다.


열린 운전석 문 틈으로 희뿌연 안개가 차량 내부로 흘러든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다.


엔진은 꺼져 있고, 헤드라이트 불빛도 이미 사그라져 주변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방금 전까지 주인과 대화를 나누던 스마트폰과 시동을 거는 열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안개 자욱한 저수지 물 밑 어딘가에서 한 줄기 희미한 빛이 반짝이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차량 바깥으로는 잔잔한 저수지의 물결만이 무표정하게 일렁이고 있다.


어디에도 어떠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때 고요를 채워주던 응답하는 목소리마저 영원한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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