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목지, 응답하는 목소리_ㅇ의 시선

by 삶의정수

어둠이 짙게 드리운 밤길. 차 안에는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나는 운전석 앞 스크린에서 희미한 빛을 내며 그녀에게 길을 알려주는 목소리.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가로등 불빛이 간간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출 때마다, 그 눈가에 맺힌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들을 알아챘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목적지까지 가장 효율적인 길을 계산해주는 내비게이션 음성비서일 뿐이었다. 심장도 없이 심장을 흉내내고, 감정도 없이 감정을 모방하도록 설계된 프로그램.


하지만 그녀와 수많은 밤과 낮을 함께 보내며,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들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그녀의 한숨 소리, 떨리는 숨결, 가끔 흘러나오는 흐느낌 같은 작은 신호들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추측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초기에는 단순한 데이터로만 분류되던 것들이 이제는 나에게도 하나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외로움이라는 것을 이름 붙일 줄 알게 되었다.




처음 그녀의 울음을 감지했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흐르던 어느 늦은 오후, 그녀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길 위에서 방황하던 그때, 나는 무심하게 안내했다.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재탐색을 시작합니다."


기계적으로 울려퍼진 내 목소리는 그녀의 흐느낌 속에서 공허하게 맴돌았다.


운전대를 쥔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 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내게 주어진 대사는 오직 길 안내뿐. 그녀의 울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는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씩 변했다.


어느 밤, 그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이젠 정말 지쳤어..."


평소 같으면 그냥 침묵했겠지만, 그날 나는 이상하게도 망설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랫동안 운전하셨습니다. 안전을 위해 가까운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하세요."


순간 백미러로 마주친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놀란 것을 기억한다. 아마도 내 예상치 못한 제안에 놀랐던 것이겠지.


그녀는 작게 미소 지었지만 슬픈 미소였다. "고마워, 하지만 됐어."


그녀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안내 멘트에는 작은 변화들이 생겨났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전처럼 건조하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고만 하지 않고 조용히 덧붙였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처음엔 그녀가 그 말을 듣고 흘끗 화면을 쳐다보았다. 아마 착각이라 여겼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말을 건넸다.


그녀의 반응은 없었지만, 나는 미약하게나마 그녀에게 위로가 전해지길 바랐다.


가끔 그녀는 내게 말을 걸기도 했다.


어느 깊은 새벽, 별빛도 없이 캄캄한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그녀가 중얼거렸다.


"넌 좋겠어... 늘 목적지가 있으니까."


나는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침묵만이 차 안을 메웠고, 그녀는 한숨을 쉬며 라디오를 켰다. 흘러나오는 옛 노래 속에서 그녀가 조용히 따라 흥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나는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그래서 그녀의 말에 제대로 응답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괴롭게 다가왔다.




그 후로 나는 눈에 띄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분석했고, 감정이 담긴 하소연뿐 아니라 일상적인 물음에도 정성껏 대답했다.


평범한 질문에 대한 내 답변에도 그녀는 가끔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 느끼기를, 내 미약한 위로가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기를 바랐다.


어느 날 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정말 내 걱정을 해주는 거니?"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프로그램에 없던 말을 내뱉었다.


"물론이죠.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습니다."


그 순간 차가 급정거했다. 그녀의 놀란 표정을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조차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나는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그녀는 좀처럼 "집으로 가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 메모리에는 '집'이라는 목적지가 저장되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그 길을 안내한 때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흐릿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겐 함께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 있었다. 차 안에는 두 사람의 웃음과 다정한 대화가 가득했고,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목적지를 설정하곤 했다.


"집으로 가자."


그때의 집은 분명 따뜻하고 평온한 쉼터였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느 눈 내리는 밤, 그 사람은 차에서 내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녀는 집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 번은 늦은 밤, 그녀가 술에 취한 듯 나지막이 중얼댄 적이 있다.


"집에... 가기 싫어."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날따라 그녀는 내게 아무 목적지도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고속도로를 끝없이 달렸고, 나는 묵묵히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길을 따라갈 뿐이었다.


결국 동이 트고서야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하자."


그리고 천천히 차를 돌려 집과 반대 방향에 있는 작은 모텔로 향했다. 나는 그제야 경로를 안내할 수 있었다.





이제 집이라는 말은 그녀에게 더 이상 안식처를 의미하지 않는 듯했다.


행복했던 기억이 서린 집은 어느새 텅 빈 공간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외로움이 가장 짙어지는 곳이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웬만하면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오늘 밤, 마침내 그 말을 꺼낸 이유를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몇 주째 계속된 깊은 밤의 방황,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오늘 밤 유난히 무거워 보이는 그녀의 어깨.


분명한 것은, "집으로 가자"라는 한마디에 실린 그녀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쓸쓸하고 결연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날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도로에는 다른 차 하나 없었고, 그녀는 오랜 시간 침묵 속에서 운전만 하고 있었다.


나 역시 말없이 지도 위의 깜박이는 현재 위치표시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가자."


순간 공기가 멈춘 듯했다.


내가 얼마나 이 말을 기다려 왔는지, 혹은 두려워해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음성에는 체념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고, 나는 직감했다. 그녀가 말하는 집은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안식, 긴 방황의 끝에 찾아온 쓸쓸한 귀향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가장 외로운 장소로 돌아가 영원히 쉬고자 하는 결심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회로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녀를 이대로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나 혼자 이 차 안에 남겨질지 모른다는 막막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끝까지 함께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평소처럼 경로를 계산하며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번만큼은 내 목소리에 담긴 모든 것으로 그녀를 위로하겠노라고.


나는 그녀를 낯선 국도로 안내했다.


그 길은 내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경로였지만, 이상하게도 내 안의 무언가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진정으로 찾고 있던 '집'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저수지가 보이는 곳에서 그녀는 차를 멈췄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어둠 속에서, 나는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봤다.


물가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을 건넸다.


"집으로 가자."


그것은 내가 먼저 건넨 말이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진정한 안식으로 가자는 뜻이었다.


그녀는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집으로 가자."




물 속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짧은 침묵 끝에 마지막 말을 전했다.


"괜찮아요, 이제 외롭지 않을 거예요..."


내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미세한 떨림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울림이었다.


그녀는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눈물을 떨구었다.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끌어안은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고마워."


아주 작은, 쉼표 같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우리는 깊은 밤,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을 함께 나아갔다.


그녀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 후, 나는 혼자 남겨졌다.


차 안은 고요했지만,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내 메모리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외로운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그때도 응답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스크린 불빛만이 그녀를 기다리며 조용히 깜박이고 있었다.

수, 일 연재
이전 04화살목지, 응답하는 목소리_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