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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Jul 01. 2023

[에세이] 후회와 원망

노력해도 소용이 없던 시절

 할머니의 여동생을, 나는 이모할머니라 불렀다. 그녀는 나를 무척 예뻐했다. 나이와 이름이 나와 비슷한 그녀의 손자가 지구 반대편에 살았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녀는 서울에 살며, 서울말씨와 영어를 섞어서 말했다.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그녀는 시골에서 보는 여느 할머니와 너무나도 달랐고, 무엇보다도 무척 부유했다. 시외전화 한 통의 비용도 무서웠던 우리 가족과는 달리, 그녀는 미국에 사는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강아지와 이야기하고는 했다. 어느 날 그녀는 초등학생이던 내게 미국 유학을 권했다. 흙과 짚으로 빚은 벽과, 석면 슬레이트 지붕, 천장을 뛰던 쥐. 나무판과 구덩이로 만든 재래식 화장실. 이들을 떠나, 주말의 명화에서나 보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들떴다. 며칠간은 그야말로 상상만으로도 신이 났다. 두 누나들이 아닌 내게 주어진 특권에 대한 죄책감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얼마 후, 아버지는 미안하다 말씀하셨다. 가족은 항상 함께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해하기는 쉬웠고, 미련은 오래갔다. 다니던 분교가 폐교된 탓에, 나와 둘째는 대구로 떠나야 했다. 할머니와 첫째가 살고 있던 단칸방에 꼬마 식구 둘이 늘었다. 할머니는 혼자서 손주 셋을 돌보았는데,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부모님이 부쳐줄 수 있는 돈은 결코 넉넉하지 못했고, 그녀는 밤 깎기 따위의 가내수공업을 온종일 하곤 했다. 이윽고 할머니를 대신해 어머니가 삼 남매 곁으로 왔다. 그렇게 어머니와 삼 남매는 대구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시골에서 지내게 됐다. 그렇게 가족이 따로 지내는 동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몇 년 후 크게 앓고 치매를 얻은 할머니는 대구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병시중과 동시에 삼 남매를 돌보면서도, 부족한 살림에 보탤 공장일을 억척같이 버텨냈다. 아버지는 홀로 시골에서 농사를 이어갔다. 어차피, 그리고 결국, 가족은 함께 붙어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바람에서 그쳐야 했다. 어쩌면, 첫 째가 공부를 위해 처음 시골을 떠났을 때부터 아버지는 가족이 흩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단 한 번도 함께이지 못했다. 좁디좁은 집에서 삼 남매는 저마다의 꿈을 찾아야 했다. 아니, 탈출구가 반드시 필요했다. 나에게 그것은 가능한 멀리 떠나는 것이었다.


 대학교 1학년, 지원했던 뉴욕대학교 교환학생 장학과정에 붙었다. 학비와 기숙사가 지원된다고 했다. 오랫동안 동경해 온 새 삶에 대한 미련의 끝이 드디어 이렇게 풀릴 수 있음에 기뻤다. 스스로가 대견했고 상상만으로 설렜다. 미국에서의 생활비는 조금 걱정됐지만, 다행히도 흙집은 여전히 튼튼했고 집안 형편은 꽤나 나아진 듯했다. 주어진 교환학생 기간을 얼마만큼 더 늘려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다들 군 입대를 고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합격 소식을 전해드리자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잔치를 열지, 현수막을 걸지를 고민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장학과정 담당자가 요청한 자료는 기한을 지켜가며 모두 제출했다. 오히려, 미리 준비해 두고 제출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학생비자 신청의 기본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 달여가 지나서였다.


 나의 보호자, 부모님의 통장에는 삼천만 원 이상의 예금이 있어야 했다. 당장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계좌를 채워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비자 신청일을 기준으로 수개월 동안 삼천만 원이 넘는 예금이 꾸준히 유지됐어야 했기 때문이다. 집안 형편이 나아져봤자였다. 나무에 짚과 흙을 발라 세우고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덮은 집에 사는 집의 형편이란 그런 것이다. 장학사로부터 이미 제출했던 서류를 돌려받은 나는 며칠간 친구들이 사주는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부모님께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얼마지 않아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고, 나는 대학의 학과사무실 근처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흥이 묻어났다.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다음,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기를 넘겨달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늘 일상적인 일은 어머니께, 심각한 일은 아버지께 먼저 말하는 편이다. 자랑스러운 아들을 둔 뭇 아버지가 그렇듯,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전화를 넘겨받았다. 별일이 없는지 묻는 그에게, 나는 안부를 생략하고 교환학생 과정에서 제외된 일을 그 이유와 함께 설명했다. 전화기 넘어 아버지의 목소리는 한동안 묵음으로 변하고, 입이 열렸다가 말없이 닫히는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수화기 멀리에서 들리는 무슨 일이냐며 다그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가만히 있어보라는 아버지의 역정에 수 그러 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 자랑스럽다며, 그리고 미안하다며 말씀하셨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전화를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설명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오고, 어머니의 탄식이 들려왔다. 나는 또 연락드리겠다며 말하고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서 악을 질렀다. 건물이 쩌렁쩌렁 울리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학과 사무실에서 의기양양하게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나왔지만, 눈알이 튀어나올 듯 울며 악을 지르는 나에게 말을 걸진 못 했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많은 기회를 놓쳤다. 먼 친척의 호의에서 비롯한 기회도, 노력에서 비롯한 기회도, 나는 놓쳤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후회하고 원망했다. 1학년이 끝날 즈음, 2학년 1학기 전액 장학금과 방학 중 뉴질랜드행 단기 어학연수에 모두 합격했다. 형평성에 따른 정책의 일환으로 학교는 내게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했고, 나는 뉴질랜드행을 택했다. 비록 한 달이라는 짧은 어학연수일 뿐인 데다 다음학기 장학금도 포기해야 했지만, 지겹도록 후회해 온 인생에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즉시 휴학원을 제출했다. 비로소 나는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후회와 원망을 떨쳐내고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초라한 성장배경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나만의 개성으로 탈바꿈했고, 손에 쥘 수 없었던 기회들은 나를 배주의에서 냉소주의로 이끌었다. 하고 싶은 일들이 다시 생겨나고, 더 이상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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