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정치, 성별과 더불어 공석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언급을 조심하거나, 금기로 여기는 주제이다. 두려움을 뒤로하고, 자문자답의 방식으로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혹시 이 글을 접한 당신이 신념을 위해 폭력을 불사한다면, 다음의 구분선 아래를 읽도록 권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종교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혹은, 무교인가?
오랜 시간 위 질문의 내 대답은 「무종교」 또는 「무신론자」였고, 내 답변이 바뀐 것은 겨우 십여 년 전에 불과하다. 지금의 나는 「불가지론자」이다. 불가지론(Agnosticism)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종교 일반』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인식론. 이 학설은 유신론과 무신론을 모두 배격한다.
「2」 『철학』 사물의 본질이나 궁극적 실재의 참모습은 사람의 경험으로는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이론. ≒불가사의론.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왜 무신론자였나?
과거, 무신론자임을 자처할 때의 근거는 다음의 두 문장으로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신이 세상의 불합리와 공포를 물리칠 수 없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둘째, 신이 전재전능하지만 세상의 불합리와 공포를 방관한다면, 신은 악하다.
전능하지 않거나 악하다면 신이라 불릴 이유가 없을뿐더러, 이는 즉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혹, 선술 한 두 문장이 익숙하다면, 당신은 기원전 341년 그리스에서 태어난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남겼다고 알려진 「에피쿠로스의 역설」을 접한 경험이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이 역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과거 나의 해석은 이 역설에서 다만 악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제외했을 뿐이다.
사실 에피쿠로스의 역설은 남아있는 그의 기록물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3세기 로마의 락탄티우스라는 가톨릭 신학자가 에피쿠로스를 무신론자로 평가하면서 기록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에피쿠로스의 역설이라 알려진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에피쿠로스를 유신론자 인척 하는 무신론자라고 판단해 그의 기록 대부분을 불사른 탓에 이 역설이 진정 에피쿠로스의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설령 에피쿠로스가 이 역설의 저자라고 하더라도, 역설을 쓴 의도는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으며, 이것 만으로 그의 철학을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춘기의 내 종교관은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흑백논리의 수준에서 지나치게 확고해져 버렸다. 에피쿠로스가 무신론자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에피쿠로스의 역설」
첫째,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둘째,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셋째,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넷째,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
출처: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피르미아누스 락탄티우스 (Lucius Caecilius Firmianus Lactantius)
왜 불가지론자로 변했나?
어른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내 종교관은 흑백논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에피쿠로스가 무신론자가 아닌 유신론자임을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신의 존재를 논할 때, 흔히 미물이라 부르는 동식물과 인간의 관계를 떠올려 보게 된다. 인간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위에서 땅속으로 구멍을 못내 말라가는 지렁이를 한 컵의 물이나 작은 손길로 구원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개미에게 새하얀 모래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천적 없는 세계를 창조해 줄 수 있다. 표본책에 박제되기 직전의 잠자리에게도 자유를 선사할 수 있다. 지렁이, 개미, 잠자리의 입장에서 인간은 언뜻 전재전능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지렁이에게 다리를 달아줄 수 없고, 개미에게 집단이 아닌 개체만의 개성을 꿈꾸게 할 수 없으며, 잠자리에게 잠자리채를 찢을 만큼 강한 턱을 선물할 수도 없다. 반면에 인간은, 한 줌의 소금으로 한 무리의 지렁이를 쉽게 말살하며,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 죽이고, 잠자리채로 잠자리를 사냥하기도 한다. 이렇듯, 뭇 짐승의 입장에서 인간은 악하기도 하다.
이런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보면 「비인격신」의 개념에 다다른다. 인간은 땅 속의 지렁이, 땅 위를 기는 개미, 하늘을 나는 잠자리에게 숭배를 기대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이 그들 나름의 의식 수준으로 인간을 숭배한들, 인간은 이를 인지할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은, 지렁이의 행복과 고난에 관심이 없고, 개미에 대한 위대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잠자리의 사후를 위한 천국과 지옥을 관장하지 않는다. 결국, 온 우주를 관장하는 신이 인간의 의식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과 인간의 「의식 수준의 차이」는 미물과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이유이다. 인간은, 적어도 나는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게 나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종교인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의 가족 중에는 기독교인, 불교인이 있다. 가까운 지기 중에도 천주교인, 기독교인, 불교인이 고루 있다. 직장의 동료 중에도 이슬람교인과 힌두교인이 있다. 이따금 기독교인을 따라 교회에 가거나, 불교인을 따라 사찰에 가기도 한다. 천주교인의 결혼식이 열리는 성당에 가는 것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과거 가톨릭과 불교를 대표하는 지도자였던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화합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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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개원법회에 김 추기경이 참석해 축사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법정 스님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에 성탄메시지를 기고했다. 법정 스님은 성탄메시지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한 생명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남"이라며 "우리가 당면한 시련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움터야 한다"라고 설파했고, 메시지 중간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적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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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합뉴스 기사 2018-03-22
종교의 유무나 그 종류에 따라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내가 나서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을 인정하는 것은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배타적 이기주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일방적 포교, 재산을 탐내는 배금주의, 폭력을 불사하는 광신주의와 극단주의, 인종이나 성별 또는 출신에 대한 차별 등은 앞으로도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다. 종종 그런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귀찮은 일이다.
기억에 남는 종교인과의 기억이 있다면?
힌두교 인도인과의 경험
업무상의 교육 때문에 프랑스에서 인도 힌두교인 동료와 한 달여를 함께 지낸 적이 있다. 동갑인 데다가 서로 마주한 호텔방에 묵다 보니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그는 비건-채식주의자였는데, 호텔이 위치한 리옹의 생 보네에서 매 끼니를 채식으로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도 점심은 회사 내부 카페테리아에서 비건을 위한 식사를 편히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아침 식사를 아예 포기해야 했다. 저녁에는 내가 햄버거를 사러 들른 패스트푸드점에서 샐러드를 사다 전해 주고는 했다. 그는 교리와 가풍에 따라 금기됨에도, 내가 구해온 술을 나눠 마시거나 담배를 태워보며 무종교인에 대한 이해를 시도했다. 나 또한 그를 따라 인도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들러 그와 같이 맨손으로 채식주의 식사를 하며 이해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 번은 그와 내가 크게 다툰 적이 있는데, 그가 불같이 화를 냈던 이유는 내가 케밥과 샐러드를 사러 들어간 가게가 이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간판에 쓰인 아랍문자를 읽기는커녕 힌디어의 디바나가리와 구분하지 조차 못했다. 그는 이슬람 식당에서 만든 음식을 거부했고, 그 가게를 들어간 나를 모욕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무종교인을 수용할지라도 타 종교를 배척하는 데 있어서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어느 목사의 설교
어린 시절, 대구의 철로 옆에 위치한 한 교회에 수년간 다닌 적이 있다. 일요일에 그곳을 찾아가면 넉넉하고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곳의 1층에는 모두에게 무료로 개방되는 도서관이 있었다. 건물의 한 층 대부분을 도서관으로 활용하는 것도 독특했지만, 무엇보다 대단했던 점은 편견 없는 도서 구성이었다. 성경이나 찬송집은 한 곳에 조그마하게 모여있을 뿐, 월간 과학잡지, 국내외 작가의 소설책, 만화책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예배가 아닌 밥과 도서관이 주된 목적이었던 나는, 이따금 도서관에 숨어서 시간을 보내다가 중고등학생 신도에게 들켜 예배당으로 잡혀가곤 했다. 그곳에서 들은 목사의 설교 중 아직까지 기억에 남은 문장이 있다.
「헌금과 십일조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여유가 되고, 이 교회의 사업에 도움을 보태고 싶은 분만 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무리해서 내실 일이 아닙니다.」
「눈을 감고 교회를 그려보세요. 혹시, 뾰족한 탑과 그 꼭대기에 십자가를 그렸나요? 이 교회와 같은 모양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교회라는 곳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입니다.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가족을 두고 혼자 나오신 분 있습니까? 글쎄요. 가족들이 하나님 미워할 것 같은데요. 기도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곳에 오실 필요는 없어요.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입니다. 그림에 필요했던 것은 그뿐이에요.」
마지막으로 종교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은?
흔히, 모태신앙이라고 하는 개념이 있다. 잉태와 동시에 부모가 믿는 종교의 은혜를 입고,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종교를 잇는다. 나는 이를 부정하고 싶다. 나는 모든 아이들이 종교를 초월하여 어울려 노는 세상을 꿈꾼다. 스스로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나이를 정하고 그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종교 행사에 참가를 금지하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의 자유인 선거권, 선거연령과 비슷하다.
현실적 어려움에 대한 사유 해보지 않고 뱉는 말은 아니다. 종교법인에 속한 고아원, 종교교육을 의무화하는 사립 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교에 대한 존립은 물론, 각 종교교육기관(이른바 미션스쿨)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교사의 일자리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종교선택권 연령」 보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의 환경과 육아에 대한 지침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종교 유무와 종류를 관리할 수 있는 행정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큰 걸림돌이다. 종교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린 자녀를 종교행사에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종교선택권 연령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성 종교와 행정기관, 정치인 간의 대립과 마찰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종교선택권 연령이라는 당돌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대부분의 종교가 갖는 선한 영향력만큼이나 소수의 종교가 갖는 폐해가 크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에 맹목적으로 몸담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대를 이어 악랄한 집단의 일꾼으로 자라난다. 교육과 사회생활에 제한을 받는 종교인의 딸들은 왜곡된 자유 속에서 삶을 지속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해 이민을 선택하기도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한 번 머릿속에 자리 잡은 종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우상화에 쓰이는 세뇌가 종교를 얼마나 탁월하게 흉내 내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