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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Jun 14. 2023

[에세이] 우연 - 1

좁은 세상

 대학교 1학년을 마칠 즈음,  다음 학기 전액 장학금과 단기 해외 어학연수에 합격 소식이 들려온다. 둘 중 아무것에도 합격하지 않으면, 군 입대나 할까 싶었는데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단기 해외 어학연수라 함은, 겨울방학 동안 뉴질랜드로 한 달간 영어공부를 보내준다는 것이다. 둘 다 장학재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지라, 장학 담당자는 내게 택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둘 다 누릴 수 있는 줄 알았던 나는 실망깨나 하지만, 결정은 어렵지 않다. 평생 나라 밖 구경을 할 기회가 있기나 할까 싶은 촌뜨기의 마음으로, 전액장학금을 포기한다.


 그렇게, 처음 비행기를 타게 된다. 비행기가 바퀴를 땅에서 떼자, 부모님의 재산이 적은 까닭으로 비자발급이 안돼 포기해야 했던 뉴욕대학 교환학생이라는 좌절감이 조금은 상쇄되는 기분이 든다. 일본의 나리타 공항과 호주의 시드니 공항을 경유해 뉴질랜드에 도착한다. 외국 경험이 있다는 선배 몇은, 아무리 돈 없는 국립대학이라지만 뉴질랜드까지 가는 마당에 이만큼이나 경유하는 항공편을 이용한다는 것은 너무하는 처사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경유할 때마다 공항 밖을 나가서 나름의 관광을 했다. 나는 그런 일이 가능한 줄도 모르고, 나리타 공항과 시드니 공항에서 총 15시간이 넘는 시간을 노숙했다. 나는 저렴한 항공편을 준비한 학교 측이 아니라, 나를 방치해 둔 선배들이 더 얄미웠다.


 뉴질랜드에 도착해서는, 이혼한 지 얼마지 않은 제시카라는 여성이 어린 아들과 딸을 키우는 한 가정이 나의 홈스테이로 지정된다. 한 날은 나를 포함한 교환학생 무리가 단체로 퀸즈랜드의 한 워터파크에 간다. 단기 어학연수란 결국, 영어를 듣거나 말할 기회가 많으면 그만인 것이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보다, 밖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런 경험에서 얻은 언어가 머리에는 깊게 새겨진다. 몹시나 넓은 그 워터파크는 실내에서 물로 할 수 있는 놀이는 모두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태어나 처음 간 워터파크에서 스무 살의 나는, 키가 내 가슴 높이 정도 되는 아이들과 어울려 신이 나서 논다. 수영을 할 줄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재미있는 미끄럼틀은 물이 깊지 않은 쪽에 위치했던 탓이다. 내가 그렇게 등짝이 발갛게 쓸리고 미끄럼의 굽이에 부딪힌 허벅지에 멍이 들도록 노는 동안, 외국 경험이 있다던 선배 중 몇이 이국의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궁금하지만 그리로 다가가지 않는다. 그쪽은 물이 깊다.


 나는 거울에 비치는 입술이 파랗게 질리도록 논다. 문득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넓은 워터파크의 구석에 모락모락 김이 피는 온천탕이 보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 온탕에 한쪽 발을 넣어본다. 이 나라의 온탕은 미지근하구나 생각하며, 다리에 이어 하반신을, 이윽고 가슴까지 물아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눈을 감는다. 부력으로 다리가 바닥에서 조금 들려 오른 자세가 마음에 든다. 이내 바닥에서 뜨거운 물이 솟고 내 양쪽 엉덩이 사이를 가른다. 따끈한 기운이 온몸을 녹여 기분이 좋다가, 오해를 사기 싫은 마음에 온탕의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십여분의 시간이 흐른다. 깜빡 잠에 들었다가, 둥근 온탕의 맞은편에서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온다. 예순 안팎의 머리가 곱슬한 여성이 옆으로 나란히 앉은 또래의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닥에서 솟는 따끈한 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 소리에 눈을 뜬 내가 자신들의 대화를 이해하는 모양으로 보였는지, 그중 머리가 고불고불한 여인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학생, 한국인이에요?>

그들 외에는 사위가 조용한데도, 나는 좌우를 훑어보고서야 대답한다.

<네, 한국에서 왔어요.>

<학생 말씨가 경상도 같네?>

<네, 대구에 살아요. 고향은 청송이고요. 학교에서 보내줘서 왔어요.>

머리가 고불고불한 여인은, 어떤 기대라도 있는 듯한 얼굴로 말을 받는다.

<나도 대구에서 왔는데. 효목동. 학생, 효목동 알아요?>

이내 나는 딱딱한 타일을 누르고 있던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눈을 휘둥그레 뜬다.

<저도 효목동 사는데요? 목욕탕 하고 자동차 정비소 사이의 골목에 살아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크게 열어 웃으며 양손으로 무릎을 친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뜨더니 아주 편안한 반말로 기쁘게 말한다.

<내, 정비소 옆에 쌀집 한다.>


나는 지구가 생각보다 작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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