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부슬 제법 내리는 아침이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서 아이들 등교 준비를 돕는다. 쌀쌀해진 가을바람에 아이들이 추울까 봐 안감이 따뜻한 우비도 챙겨 입히고, 신발장에 장화도 가지런히 놓아둔다. 아이들과 나란히 우산을 펼쳐 들고 한 명은 학교로, 한 명은 유치원 버스가 기다리는 정류장으로 배웅을 하고 나면 이제야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친정엄마가 볶아서 보내주신 보리를 물주전자에 담고 팔팔 끓였다. 피부에 차갑게 닿았던 공기들이 이제야 적정한 온도를 되찾은 듯하다. 구수한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운다. 행복한 냄새다.
이제 거실에 잔잔한 음악을 켜 두고 내 할 일을 할 시간. 노트북을 열고 턱을 괸다. 써야 할 것은 많지만 아직 생각의 정리가 되질 않았다. 찍어놓은 사진들을 다시 보며 두 손을 재빨리 움직인다. 세 문장이 늘어났고, 다시 마음에 들지 않아 생각에 잠긴다. 그래도 괜찮다.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오던 10년. 결혼식 때 화려했던 신부 입장 이후로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었다.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엄마로 책임을 다하며 사는 동안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줬을 때, 그제야 내 마음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었어요?”
“엄마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그럼 지금이라도 하면 되잖아요.”
“아니. 이제는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아. 작가가 되고 싶지.”
아이는 매일 꿈을 품고 자라는 나이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연둣빛 새싹처럼 그런 싱그러운 모습이 예뻤다. 그런 아이가 어느샌가 자라 엄마의 꿈도 응원을 하고 있다. 그렇지. 엄마도 여전히 꿈을 품을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언제나 내 이름으로 사는 것. 내가 당당해지는 것.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일을 요즘 들어 용기 내어 말하고 다니는 중이다. 나는 요즘 글을 쓰고 있다고.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고. 글을 쓰러 혼자서 한 달에 한번 여행도 하고 있다고 말이다. 성과가 없는 중간과정에서 이렇게 공표해버리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일인 줄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잘하고 싶어 안달 거리며 살았던 삶에서 ‘여행’과 ‘글’이 내게 준 선물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기쁨이기에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무사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여행은 마흔을 코앞에 둔 1년 전, 나이가 들어가며 느끼는 불안과 주변 사람들과 내 위치의 상대적인 비교로 번아웃이 왔을 때 남편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무작정 혼자서 떠났던 날의 해방감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누군가의 아내도, 누군가의 엄마도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충분한 휴식기를 통해 나를 잘 보살펴서 마음에 다시 안정적인 박동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는 혼자만의 여행 후 내 자리인 집으로 다시 돌아가,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할 일들을 하며 또 한 달을 보낸다. 그 와중에 글로 복기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계속 알아내고, 좋아하는 것을 되찾고, 꿈꾸는 것을 응원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