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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Nov 30. 2022

흰머리가 아름답게 보이는 때

언젠가부터 자꾸만 거울만 보이면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젊을 때엔 가질 수 없었던 하얗고 반짝이는 이것은 자꾸만 “저기요!”하며 내 눈을 마주치려 손을 든다. 30대 후반부터 한 두 가닥씩 생기던 것이 이제 머리를 뒤적거리다 보면 숨겨져 있던 집성촌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이마 헤어라인이나 옆쪽이 아닌 뒤통수에 있는 것들이 내 눈에 띄어서 나는 매번 거울 앞에서 한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처녀귀신처럼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시선은 최대한 위로 치켜뜬 채 흰머리를 찾으려 할 때면, 뒷목도 아프고 눈도 쩌릿쩌릿하여 힘이 들었다.


어릴 땐 부모님의 흰머리를 발견하면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나당 100원씩 쳐주던 유일한 용돈벌이가 꽤 쏠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흰머리로 돈을 벌 수도 없고, 초라하게 털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이 흡사, 동물원에서 본 할 일 없는 영장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며칠 전에는 흰머리를 뽑은 자리에 새싹처럼 두 가닥의 흰머리가 다시 자라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또 그 며칠 전에는 뒤통수 쪽 짧은 흰머리를 뽑는데(난이도 별 다섯 개!), 얄궂게 핀셋을 비켜가는 바람에 성질이 났다. 뽑기에도 애매하고, 염색하기도 애매한 흰머리들은 요즘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이다.




내년이면 마흔이 된다. 젊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하고 늙었다고 말하기엔 모호한 끼어있는 나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포기하고 살기엔 너무 이른 것 같다. 하지만 아이를 출산하고 힘들었던 양육의 인고를 겪다가 이제야 조금 헤쳐 나올 수 있는 여력이 되고 보니 마흔이 되어버리는 현실이다. 흰머리가 보이면 조급함이 생기는 것처럼 마흔이라는 숫자가 나의 삶을 자꾸만 어딘가로 당기는 것 같아 불안했다. 같은 나이대의 워킹맘들은 승진을 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빛내고 있었기에 빛나지 않는 것 같은 나의 삶과 비교가 될 때면 마음에 구멍이 숭숭 생겼다.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일들은 흰머리처럼 누군가의 눈에 거슬리는 일들이었다. 전업주부가 글을 쓰느라 하루의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것, 서평단 활동 때문에 늦은 시간에도 책을 읽고 있는 것, 여러 독서모임을 하면서 사람들과 줌으로 대화를 할라치면 아이들을 방 안으로 들여보내야 하는 것. 그 무엇 하나 떳떳하게 돈을 벌면서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런 일들을 해나가느라 집안일이 뒤로 밀리기라도 하면 괜스레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  
- 정호승 시인-

하지만 창문 틈으로 걸친 유난히도 동그란 달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다짐을 해본다. 무언가가 빛나는 이유는 더 이상의 빛을 감추지 못해서 아닐까? 내가 하려는 일은 어느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니다. 나를 위한 일이다. 나 스스로 빛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치 보는 일은 이제 그만. 그리고 나는 지금처럼 내 길을 가야 한다. 동경하던 <쓸모 인류>의 빈센트 할아버지나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의 밀라논나 할머니도 결국은 규정짓고 편견에 맞서서 당당히 도전하며 빛나게 된 것이다. 


노트북을 붙들고 매일 손가락을 움직인 지 세 달이 되어간다. 브런치에 매일 한 편의 글을 올리고자 다짐했고, 부담 갖지 말고 짧은 글이라도 계속 써 내려가자고 마음먹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동력은 의지와 다르게 점점 힘들었고, 에피소드를 쥐어 짜내야 해서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이제와 뒤돌아보니 어느 정도 브런치북으로 묶을 만큼의 양은 나왔다. 썼던 글 중에는 내가 썼지만 애정이 가는 문장들도 종종 있다. 분명 이전의 글보다는 농익은 글이다. 


요즘 나는 이전에 포기한 것들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음에 대해 생각한다. 늘 결과만 쫓으려 했기 때문에 성숙해지는 과정을 보지 못했다. 어느 순간 단단하게 차올라 빛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거리를 나가보면, 오히려 자기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다니는 노인분들이 많은 것 같다. 흰머리를 까맣게 바꾸는 것보다 본인이 좋아하는 핑크색이나 보라색, 초록색으로 염색을 하시는 분들이 도리어 눈에 띈다. 억지스러운 검은색보단 화려한 색의 머리카락이 그 나이의 옷과 분위기에 더 잘 맞아 보였다. 

몇 가닥의 흰머리는 신경 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간 그것들이 나를 빛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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