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쓰던 화장품이 다 떨어져서 외출을 해야 했다. 집에서 점심을 챙겨 먹고 가기엔 여유 시간이 어정쩡하게 남아있어서 애매했다. 나는 결국 집 앞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크로크 무슈를 시켜 먹는 걸 택했다. 9,700원. 지갑에서 친구에게 선물 받은 스타벅스 기프트카드를 꺼내 결제를 했다. 이유는 남편이 신경 쓰여서였다.
전날 저녁, 남편의 퇴근길에 커피 좀 사다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내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포장해오고, 본인의 커피는 그 옆 메가 커피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사 왔다. "나는 커피맛을 모르니까 괜찮아!"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느껴져서 유난히 커피맛이 썼다.
우리 집의 돈 관리는 남편이 수년째 맡아서 하고 있다. 외벌이로 돈을 벌고 있고, 돈을 모으는 것에도 나보다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기에 경제권이 남편에게 있는 것에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따로 돈을 갖고 있지 않고, 남편에게 받은 ‘남편 명의의 체크카드’로 매달 소비하며 생활하는데 가끔은 이런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카페에서 이 정도 돈을 쓰는 것을 뭐라 할 남편은 아니지만 이어지는 잔소리들이 듣기 싫은 상황도 있다. 가령, 왜 밥을 챙겨 먹지 않고 빵을 먹냐라던지, 왜 점심이 늦어졌냐는지, 아니면 사사건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리고 싶지 않은 상황일 때도 있다.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카드내역이 찍히면 전화가 온다거나 하는. 한 마디로 맘 편하게 행동하는 것 자체가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말하면 남편은 아마도 경을 칠 것이다. 분명 쓰고 싶은 것 있으면 쓰라고, 그래서 체크카드를 준 것인데 왜 눈치를 보냐고 하겠지... 하지만 돈을 쥐고 있는 사람과 쥐고 있지 않은 사람의 입장은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집안에 있을 땐 괜찮지만 외출만 하면 돈이 줄줄 새어나간다.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의 반찬을 사고 필요한 것들 몇 가지만 사도 돈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커피를 마시고 화장품을 사러 가서도 나는 똑같은 갈등을 했다. 필요했던 아이크림과 립밤, 아이섀도를 집고 다른 것은 보지도 않고 곧장 계산대로 향했지만 105,500원. 똑같은 상황이다. 이걸 계산하고 나면 남편은 “뭐 샀나 보네? 잘했어.”라고 할 테지만, 나는 그런 연락 자체가 부담이 되는 것이다. 굳이 “아, 나 화장품을 다 써서.”라고 변명하는 것도 싫고, 여자의 꾸밈비에 해당하는 돈들을 남자들이 모두 이해해줄 리도 없다. 같이 쇼핑을 하거나 외식을 할 때에는 괜찮지만 남편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시간에는 혼자서 무언가를 소비하는 것에 괜스레 미안함을 느낀다. 길거리에서 예쁜 옷을 발견해도 5만 원이 넘으면 살까 말까 고민하는 것, 오늘처럼 화장품을 사며 10만 원 이상이 갑자기 빠져나가게 되는 것들. 나는 결국 남편의 체크카드 대신 내 신용카드를 꺼냈다.
물론, 내 신용카드를 쓴다고 해도 어차피 남편에게 청구해야 할 돈이지만 일일이 체크카드 내역으로 회사에서도 나의 동선을 어슴푸레 파악당하는 것보다는 나중에 구차하게라도 뭉텅이 돈을 손 벌리는 것이 낫다.
돈을 쓰고 왔는데 집안꼴이 더러우면 괜히 할 일을 하지 않고 논 것 같아서 찝찝했다. 자존감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은 결국 나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존감의 높낮이는 돈의 많고 적음과도 결국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돈의 액수에 따라 자꾸만 쪼그라들고, 계속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떠한 간섭이나 제한 없이 내가 가진 것에서 내가 정하는 기준에 맞춰 돈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다. 운동을 하더라도 아파트 단지 헬스장을 이용하는 내가 마음속으로는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1:1 트레이닝을 받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 지금과는 달라졌을 거라고 구차한 변명도 같이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