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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민 Jun 14. 2022

나의 우연한 대치동 입성기 (2)

고민 끝에 나는 대치동에 남기로 했다

나의 우연한 대치동 입성기 (2)



모진 말들을 뒤로하고 대표강사로서 맡은 1년의 첫 시작은 사실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반의 인기 강사는 정규반 한 반에 학생 100명씩을 앉혀놓고 수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고2 학생들을 처음 맡게 되었는데 첫 수업에 5명의 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원장님이 모든 설득과 인맥을 동원해서 만들어 준 귀한 5명이었다.



나름대로 강의를 열심히 진행했는데 다음주에 강의실에 가보니 실장님이 오늘은 학생이 3명이라고 했다.대수롭지 않게 두 명이 결석한 거구나, 하고 들어갔더니 모두 새로운 학생들이었다. 첫 수업에 들어왔던 5명이 모두 나가고, 새로운 학생 3명이 채워져 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앞으로의 강사 인생에 대해 쓰게 고민해야 했다.



그래도 꾸준히 열심히 강의를 하자 조금씩 학생이 늘기 시작했다. 대표강사라고해서 처음부터 학생들이 폭발적으로 모이는 것은 아니었다. 한 명 두 명 차곡히 늘어나고, 15명이 30명으로 늘어나 그 해 파이널 수업까지 이어졌다.




학생을 늘려가는 보람 말고도, 나를 학원가에 붙잡아두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첫 해 파이널 강의를 했을 때는 급여가 시급으로 책정되었고 단 일주일 동안만 강의를 했는데 당시 600만원 정도의 주급을 받았다. 새벽의 편의점에서 한달을 일해 50만원을 벌던 내가, 한 주 만에 600만원이라는 금액이 통장에 찍히자 너무 놀라 원장에게 금액이 잘못 들어온 것 같다고 전화를 했었다.



"선생님 원래 급여가 450만 원인데 특별 상여금으로 150만원을 더 넣었어요"


원장은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학원 강사가 얼마나 많이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인지를 깨달았다. 그 다음 해부터는 대표강사로 일을 하면서 이젠 시급이 아니라 학원과 강사가 일정비율로 수강료를 나누어 갖는 방식인 비율제로 급여를 받았다. 파이널에 내가 맡은 학생들이 몇 백명이었고, 여러 대학별 강의들을 수차례씩 진행했으니 나중에 계산해보면 거의 2억이 되는 돈이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서 한번도 만져보지 못한 돈이었다.


내내 신림동 4평짜리 원룸에서 월세를 살던 나는, 매월 내는 금액이 부담스러워서 당시 살고 있던 원룸의 전세 시세를 부동산에 물어본 적이 있었다. 부동산 아저씨의 대답은 3천만원이었고, 나는 그 돈을 모으기 위해 1년 동안 과외며 아르바이트며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3천만원을 수중에 마련한 날, 다시 방문한 부동산에서 돌아온 대답은 5천만원으로 전세가격이 올랐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포기가 안 되어서 오기가 생긴 나는 다시 한번 5천만원까지는 모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인생이 다 그렇듯,  전세가 오르는 것이 늘 한발 더 빨랐다. 그래서 내가 평생 살면서 모아봤던 돈은 5천만원이 가장 컸다. 그렇게 살다가 한달만에 2억이라는 돈을 만지니 이건 신세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 내 손에 든 돈을 바라보고 고민해야 했다. 돈을 보니 대학원에 다니고, 입학사정관을 하면서 마주친 교수들 생각이 났다.


50살이 지나면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교수들이 많아진다. 대학원 때 만난 교수와 기업에서 들어온 프로젝트를 같이 했었는데, 프로젝트 급여가 안 들어와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곤란했었던 적이 있다. 총대를 메고 담당 교수한테 왜 프로젝트 급여가 들어오지 않는지 묻자, 교수는 버럭 화를 내면서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배우는데 왜 돈을 받을 생각을 하냐고 했다. 참여 학생들에게 새로이 통장을 개설하게 하고, 비밀번호를 통일시켜서 수거해갔던 교수였다. 지금에야 시절이 많이 흘러 이런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사회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가진 서울대 교수가 되어서도 이렇게 돈에 미련 정도가 아니라 찌질한 집착까지 하는 교수들을 많이 보아왔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결국 명예와 돈의 저울질 때문이 아닐까. 보통 30대 후반에 교수로 임용이 되면, 월급은 높지 않더라도 나이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서울대를 다니고 서울대의 교수가 된 사람들의 동기들 역시 좋은 기업에 대부분 취업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40대 중반이 넘어가면 교수의 지위와 경제적 상황을 역전 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때부터는 교수들도 특별히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상대적으로 만족감이 크지 않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도 당시까지는 대학원에 발을 걸쳐 놓으며 나름대로 교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 손에 들고 있는 이 큰돈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지를 나에게 물어보아야만 했다. 만약 교수가 된다고 해도 50대에 그렇게 돈에 집착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돈을 잡을걸, 하는 후회가 없으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 돈을 벌면서 살아도 언젠가는 내가 이루지 못했던 길에 대한 미련이 남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학원가에 남기로 했다. 







대표강사로서 일하면서 학원가에서 느낀 것이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게 많으면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해진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이건 학원가뿐만 아니라 인생의 어디든지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모든 일을 투명하게 처리하는 것. 그래야 내가 비로소 떳떳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강사의 특권 중 하나는 강의실 경쟁이 치열한 파이널 기간에 가장 큰 강의실을 대표강사 이름으로 맡아두는 것이다. 평소에 인기가 적든 많든 간에 학생이 빠듯하게 몰리는 파이널 기간에는 넓은 강의실이라도 어떻게든 다 차기 마련이었다. 즉 강사의 인기보다는 강의실 크기에 따라 파이널 강의의 인원수가 정해지는 것이다. 나 역시 대표강사였기 때문에 그런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원칙은 앞서 말했듯 투명함이었기 때문에, 기존과는 다른 방식을 택해야 했다. 등록을 받고 난 후 3일째 되는 날까지 인원수를 체크해서 등록생 수가 많은 순서대로 강의실을 배분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대반을 맡고 있었고, 서울대의 수요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 가장 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큰 강의실을 잡을 수 없었을뿐더러 더 나아가 주로 옆 건물 중국어 학원을 빌려 얻은 임시 강의실을 주로 써야 했다. 그런 강의실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거리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당당했기 때문이다.



그 학원에 나오게 된 이유도 결국 내가 세운 투명함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없는 사실을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내고 멋있게 포장해야 하는 대치동 학원가의 생존법칙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나의 그 원칙과는 마찰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입학처에서 근무했을 때도 투명하지 않은 시스템 때문에 거짓말하기 싫어서 뛰쳐나온 것이기도 했는데, 학원도 결국 마찬가지인 집단이었다.


논술학원을 나오고 다른 대형 종합학원으로 옮기면서 내가 내민 조건은 딱 하나였다. 거짓말하면서 일하지 않겠다는 것. 새로운 원장님은 그걸 흔쾌히 허락을 해 주었다. 이 원칙을 아주 치열하게 지켜왔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험난한 대치동에도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원칙이 있다면 비교적 덜 흔들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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