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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민 Jun 03. 2022

나의 우연한 대치동 입성기 (1)

나의 우연한 대치동 입성기 (1)




내가 그 당시에는 전무했던, 입학사정관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대치동에 입성했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시 나는 안심하고 전 직장에서 벌어둔 돈을 까먹으면서 대학원이나 잘 마치자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금전 감각은 얼마나 무감각했던지 편의점에서 체크카드가 잔고부족으로 결제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통장을 확인해 볼 지경이었다. 


고작 2600원이 남아있던 통장을 보고 아연해진 나는, 우연히 관악구청 안쪽 동네에 있던 골목의 편의점에 붙어 있던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생각해보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30살 언저리였고 새롭게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몇 번 염탐했던 새벽의 편의점은 손님과 유동인구가 적었고, 그렇게 당장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재고를 관리하고 새로운 물품을 채워 넣는 일로 완전히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게 새벽마다 몇 시간 정도 일을 하고 나면 한 달에 50만 원 정도의 벌이가 생겼다. 그 정도면 신림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내 한 몸을 건사하기엔 충분했다.


두세 달 정도 이어지던 새벽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이유는 당시 공기업에 취업한 친한 친구가 우연히 손님으로 찾아오고 나서였다. 막 맥주를 계산한 손님의 얼굴을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공기업에 취직했던 친구는 아직 신림에 머물면서 직장까지 출퇴근을 하던 중이라고 했다. 너 왜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냐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사정이 이렇다며 대강 설명을 해주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는 새벽에 알바를 하고 있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다른 일들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면서 대학에 취업을 지원해주는 센터 홈페이지를 찾아보라고 조언해주었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가면 학원 강사 공고가 꽤 올라와 있다고, 그런 곳을 가면 여기보단 조건이 더 괜찮을 거라고 하면서 말이었다.


집에 돌아가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니, 정말로 학원의 구인공고는 많이 올라와 있었다. 국어 강의, 수학 강의 등 대부분의 공고는 과목의 강사를 구인하는 것이었는데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따로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만 할 것 같아 부담이 되었다. 유일하게 시간을 많이 내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논술 첨삭 일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원고지 한 장을 첨삭하면 1만 2천 원 정도를 주었다. 얼핏 계산해봐도 하루에 두 장만 첨삭해도 한 시간 안에 가능할 텐데, 그렇다면 하루에 한 시간만 투자하면 60만 원어치의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훌륭한 조건이었다.





몇 개의 학원을 추려 이력서를 제출하자마자 곧 어떤 학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에는 전혀 몰랐지만 그 학원은 대치동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입시학원 중 하나였다. 사실 첨삭 알바를 뽑는 프로세스는 형식적인 이력서마저 필요 없는 것이 관례였지만 마침 그때 그 학원의 지원 공고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첨삭 아르바이트생에게도 이력서를 요구했고, 거기에 쓰여있던 나의 이력을 읽은 학원 측에서는 채용담당자가 아닌 원장이 직접 나와 면접을 보았다. 면접을 보러 가벼운 마음으로 학원에 갔는데 원장실로 안내를 받아 적잖이 당황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첨삭을 구한 선생님이 나의 이력을 보고서는 첨삭 알바로는 넘친다고 판단했던지 원장에게 직접 다른 자리를 맡기라며 소개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원장이 제안한 것은 첨삭 일이 아니라 논술 강의였다. 강사가 부담스러워 첨삭 알바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전화로까지 길게 이어지는 끈질긴 설득에, 일단 시범강의 준비만 해보겠다고 했다.


당시 시범 강의는 1차로 논제를 받고 2시간 만에 답을 써낸 후, 2차로 강사들과 원장 앞에서 그 문제를 풀이하는 강의를 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내가 받은 문제는 공교롭게도 내가 입학사정관으로 근무했던 당시 출제되었던 문제였다. 내가 논술 입시를 담당했었기 때문에 어떤 교수가 어떻게 출제했는지, 문항의 출제 의도까지 훤하게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1시간 만에 답을 술술 써서 보낸 후, 그 문제를 들고 시강을 하러 학원으로 갔다. 나 말고도 시강을 하러 온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은 짧은 인사를 나누곤 당시 온라인 인강에서 논술 1타 강사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학원 강의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은 나와, 당시 온라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사의 대결은 어쩌면 불 보듯 뻔한 것이어서 그 순간 약간 풀이 죽었다. 심지어 그분이 먼저 앞에서 강의하고 혹평을 받고 있는 것이 강의실 밖 내 귀에까지 들릴 지경이었으니 더욱 긴장이 된 채로 강의실에 들어가야 했다. 


당시 문제는 국가와 종교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것이었고, 논술 문제의 해제 역시 내가 알고 있는 교수의 출제의도와 맞게 설명했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은 강사들의 평은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잘못 알고 있고, 틀리게 풀었다고 평가했다. 내가 풀어낸 그 답안의 논리도 영 틀린 것 같지는 않은데 출제의도는 그와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찰나의 고민 끝에 그 자리에서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왜 맞는지를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를 평가하는 자리에 있는 심사위원들의 권위를 대놓고 깎아버리는 것이 나에게 절대 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속으론 많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로라하는 대치동의 논술학원도, ‘출제의도’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동료강사들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최종 합격을 하고 얼떨결에 새벽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서 탈출해 대치동 한복판에서 논술강사로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한 명의 강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강사들은 나를 채용하는 데에 반대했고 원장은 그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뽑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반대하지 않은 단 한 명의 강사가 원장님에게 말하기로는, 오늘 대어를 낚으신 거라고 전했다고 한다. 그 학원의 입장에서는 대어였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이 학원에 들어오면서 나의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음에는 틀림이 없다.





내가 뽑힌 시기는 또 우연하게도 9월이었다. 대학 입시는 1년을 단위로 반복되고, 논술시장은 9월부터 대목인 수능 이후의 파이널 기간을 준비한다. 나를 뽑은 학원 측에서는 나의 이력을 내세워 파이널 강의의 대대적인 설명회를 준비하고자 했다. 당시 그 학원은 그전까지 일하던 대표강사가 잘 나가는 선생들을 모아서 다른 학원을 차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원장에게는 그 위기를 타개해 줄 사람이 바로 특별한 이력을 가진 ‘서울대 전 입학사정관 출신’의 나였던 것이다. 


나는 학원의 규모 있는 설명회에도 경험이 없던 초짜였으니 피피티며 자료며 준비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 뿐이었다. 입학관리본부에서 학부모들이 찾아오면 상담해주던 것처럼, 칠판에 하나하나 써가면서 설명을 했다. 그때 서울대는 논술시험이 존재했는데, 1단계인 서류심사를 통과한 학생들만 논술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즉 서류합격의 여부가 논술 전형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이슈였다. 당연하게도 1단계 서류평가의 기준에 대해 어떤 요소들이 어떤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 다른 디테일한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는지와 같은 정보는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학생이면 서울대 논술을 중심으로 연습을 하면 되고 그게 아니면 서류 심사가 없는 연대 논술이나 고대 논술에 집중을 해야 된다는 설명은 당시 찾아온 학부모들에게 꽤나 반응이 좋았다. 


설명회 반응이 좋으니, 원장은 이제 곧 시작될 파이널 강의들도 해보지 않겠느냐고 내게 제안했다. 그렇게 나는 첫해에 당장 서울대와 연고대, 서강대, 그리고 한양대 강의를 맡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하루 밤을 새워서 강의를 준비하고, 그다음 날에 바로 그 내용을 강의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다른 강사들과 다르게 준비해두고 쌓아두던 자료가 없었으니, 온갖 자료를 뒤지고 탐색하는 것부터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유독 철학 문제가 어렵게 나오던 고려대학교의 제시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문을 뒤져 밤을 새 가며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그 노력보다 힘든 싸움이 남아있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더 치열한 싸움은 오히려 강사들 간에 일어난다. 그것은 강의만큼이나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이었다. 


입학사정관 경력을 앞세워 강사 경력도 없이 굵직한 강의를 맡게 되자, 몇몇 강사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게 관심을 보였다. 그중에서 당시에 꽤나 비싼 밥을 사면서 먼저 인사를 했던 한 강사가 있었다. 나와 같이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원 돌아가는 사정이나 모르는 것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라는 호의를 선뜻 내비치길래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한 방송국에서 서울대 입사관 출신이 최초로 대치동 학원가에 입성했다는 뉴스가 터졌다. 누가 봐도 나를 겨냥한 뉴스였다. 학원에도 전화가 여러 통이 올 정도였으니, 서울대 측에도 인터뷰 요청이 갔던 모양이었다. 서울대에서는 그 사람은 입학본부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이 아니었던 사람이어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일반적인 답변을 했다. 답변 내용이 어찌 됐든 나는 논술을 가르치러 대치동에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크게 마음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 우연히 그 뉴스를 보도했던 기자와 아는 지인이 있어 어떤 경위로 그 뉴스가 작성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취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제보를 받았다고 한 것이다. 주변을 봐도 특별히 나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상황을 더 알아보니 학원 내부의 강사였다고 전달이 왔다. 며칠 전 나에게 웃는 얼굴로 밥을 산 그 강사였다. 겉으로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대치동이 살벌한 동네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해 파이널 강의가 모두 끝나고 12월 말에 학원 전체 회의가 열렸다. 다음 해에 있을 수업 전반에 대한 회의였다. 그 회의 전날, 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실장들하고 논의를 해보았는데 선생님이 대표강사를 맡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겨우 3개월 동안 강의를 한 내가 대표강사라니, 별다른 학원 이력도 없는 내가 무슨 이 학원의 대표강사를 맡을 수 있겠느냐고 놀라 반문했더니 원장은 파이널 강의를 충분히 잘 해냈으니 대표강사의 자격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나는 대표강사가 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어필했지만 다음 날 결국 회의에서 원장이 모든 강사의 앞에서 대표강사를 정성민 선생님으로 하기로 결정했다는 선언을 폭탄처럼 던지고 말았다. 


그때의 회의실 분위기는 찬물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모자랄 만큼 굳어졌다. 긴 정적을 깨고 나를 시범강의에서부터 좋게 평가해 준 강사 한 명만 잘 결정했다고 말을 얹어주었다. 하지만 나를 방송국에 제보했던 여자 강사는 본인은 이해할 수 없다며 굉장히 모욕적인 말투로 화를 냈다. 서울대 출신에 서울대 입학관리본부에서 입학사정관을 했다고 하긴 하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자기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앞에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렇게 모진 말을 쉽게 하는 것에 나도 적잖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장의 강력한 주장을 결국 꺾기는 힘들었고 내가 결국 대표강사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강사들 간에도 위계가 있고, 좁은 학원 안에서도 더 높은 위치로 가기 위해서 어떤 경계 섞인 눈초리와 뒷말들이 오고 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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