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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우 Jan 15. 2023

걸음의 속도

보이는 것이 달라질 만큼 천천히

어째서 평소와 달리 자전거를 타거나 버스를 타지 않고 걷겠다고 생각했는지를,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채 해가 쨍하게 내리쬐는 도로를 20분 걷고 나서야 깨닫는다. 요가원으로 향하기 직전까지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을 들고 있었고, 그녀가 계속해서 그녀의 산책길에 보이는 풍경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산책로 위에 나도 함께 있고 싶었고,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보조를 맞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런 산책로가 있을 리 없다. 완벽하게 보존된 돌고래의 해골이 떠내려오는 해변가도, 흰 부엉이의 깃털을 찾아내거나 여우가 나타는 숲도, 여기에는 없다.


집 바로 앞을 지나가는 3년 후 개통 예정인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라 매일 새벽 공사차가 후진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다. 일요일이라 잠시 조용한 공사장을 지나 넓게 뚫린 8차선 도로 옆을 걸어 요가원으로 간다. 한 시간 동안 핫요가 수업을 하며 땀을 실컷 흘리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길은 평소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루트를 선택한다. 샵하우스라고 불리는 낮은 상가 건물을 두 채째 지나오는데 처음 보는 정육점을 발견했다. 이 근처에 정육점이 있는 줄 몰랐는데, 하고 선뜻 들어가니 오늘 샤부샤부용 고기를 세일 중이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와규를 전문으로 파는 집이라니 비싸고 맛있는 고기를 조금만 먹고 싶을 때 오면 되겠군, 하고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 다음에 올게요, 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바로 옆에 커피숍과 일식집이 보인다. 이 건물은 입구가 살짝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날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가게들이다.


8차선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비켜선 즈음에 우리 집으로 통하는 지하도가 있다. 별생각 없이 익숙한 발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섰다. 여기, 예쁘네. 항상 이렇게 예뻤던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싱가포르의 울창한 나무들이 돋보이는 각도. 30도만 고개를 틀면 8차선으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그 작은 각도 차이로 여기만 난데없이 다른 세상이다. 햇살이 싱그럽고, 나무들은 제멋대로 자란다. 우리가 바쁘거나 슬프거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채로, 누가 바라봐주거나 무심코 지나치거나 전혀 관심도 없는 채로 거기에서 햇살을 받고 있다.


큰 도로 쪽 수풀이 스륵스륵 흔들리더니 암탉 한 마리가 퐁, 하고 튀어나온다. 그 뒤를 따라 수탉 한 마리가 퉁, 하고 쫓아 나온다. 한눈에도 힘이 넘치고 아름다운 수탉이라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넋을 잃고 한참을 쳐다봤다. 저렇게 튼튼한 다리라니, 삼계탕으로 두 시간쯤 끓여도 엄청 질길 것 같은 느낌이네, 하고 나도 모르게 생각해 버린 후 재빨리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미안, 내가 익숙한 닭은 너 같은 모습이 아니라서 그래, 이해해 줘. 꼬리가 짙은 초록색이고 붉은 벼슬 아래로는 빨강 주황 파랑의 깃털들이 당당하게 빛나고 있다. 전통 한국화에서나 볼 법한 저런 어마어마한 수탉을 앞뒤 맥락 없이 이런 도로에서 마주치다니. 싱가포르가 아니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차,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브런치에 글로 남겨볼 걸 그랬나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한다. 수탉이 사라진 풍경에서 고개를 돌리니 아름다운 나무들이 여전히 거기에 있어서 그 사진을 찍는다.


그대로 템포를 일정하게, 일 초에 한 걸음씩, 자박자박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햇살이 쨍하고 나무가 싱그러운 것으로 충분한 일요일 오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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