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싱가포르 산 지 꽤 되었는데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고 물으면 고민도 없이, 망설이지 않고 한국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답변을 했다. 왜냐는 질문에는 그때그때 답변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명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 커리어, 사회적인 기대치와 시선 등 그럴듯한 답변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명확한 이유를 찾아낼 필요도 없었다.
상담을 받고, EMDR 트라우마 치료를 진행하고, 코칭을 받으며 나 자신을 한 겹 한 겹 벗겨나가며 깨달았다. 내가 명확한 이유 없이 사용한 '절대로'라는 단어 한 겹 아래에는 파헤쳐볼 만한 감정들과 기억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깊은 바닷속 난파선에서 찾아낸 것 같은 무시무시한 상자를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외면하다가, 이제야 실눈을 뜨고 조금씩 열어내기 시작했다.
아무튼,
어쩌다 보니 오늘 아침은 서울 광화문 근처의 카페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절대로'라고 해 봤자, 삶은 그런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나를 이곳에 데려다 두었다. 새로운 직장 사무실은 종로에 있고 나는 출장으로 한 주를 여기에서 보내게 되었다.
쉴 새 없는 일정이었고 몸이 좋지 않았는데, 감사하게도 어제저녁잠을 푹 잤다. 5시 55분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급한 메시지들에 답장을 하고, 찬물에 샤워를 하고, 준비를 마치고 나서도 아직 출근까지 2시간이나 남았다.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가 시간 나면 꼭 가보라며 근처의 커피숍을 추천해 주었는데, 찾아보니 8시에 문을 열어서 들렀다 가기로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시간은 8시 29분.
카디건을 챙겨 입고 가방을 메고 나온다. 이어폰을 찾아 끼고 매일 아침 출근길에 듣는 노래를 튼다. 한 달 넘게 첫 곡은 Pink sweat의 At my worst, 익숙한 노래가 나오자 발걸음이 노래에 맞춰 가벼워진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시청 앞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 나는 아침 출근길이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었지, 하고 갑자기 깨달았다.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이에 깜빡 잊고 있었던 내 조각들을 되찾았다.
삶이 질척한 진흙탕처럼 느껴지던 때가 분명히 있었고, 감사하게도 늪을 빠져나와 덕지덕지 들러붙은 내가 아닌 부분들을 떼어내면서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 과정을 거치며 내 안에 아주 작지만 반짝거리는 어떤 것들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게 되는 순간들을 허투루 넘겨버리지 않는다. 그 순간에 발견하는 것은 파닥거리며 뛰는 심장일 수도, 번뜩 알아차리게 되는 진실일 수도, 배꼽에서부터 퍼지는 온기일 수도, 혹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일지라도 소중하게 꼭 붙든다. 다시 눈을 뜨고 삶을 마주할 때 내 눈빛 어딘가에 그 반짝임이 남아있도록.
그 반짝임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라고 생각했다가 그건 잃어버릴 수 있는 종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반짝임을 잃지 않도록 보살피고 닦아주는 것이 필요할지는 몰라도, 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찾아낸 것을 보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닐 거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내일까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오늘 아침은 반짝반짝하게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