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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우 Oct 25. 2023

생강 생각

난데없지만.

눈을 뜨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어린 생강을 한 움큼 물에 담아 불리고, 한 손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톡 뜯어내 숟가락으로 삭삭 긁어 껍질을 벗기고, 맨들맨들해진 하얀 생강을 물에서 건져내는 것을 난데없이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생각하고 있다.


난데없이 - 그렇지. 꿈을 꾼 것도 아닌데 새벽바람부터 생강이라니 난데없을만하다. 그러나 생강과 함께 온 것은 외할머니 생각이고, 그녀가 두툼하고 주름진 손으로 생강을 집어 고사리 같은 내 손에 쥐어주며 숟가락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껍질을 더 쉽게 벗길 수 있는지 알려주던 감촉이다. 생강보다 더 여린 내 작은 손가락 끝 마디가 물에 불어 쪼글쪼글해진 감촉을 함께 기억해 낸다.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나는 생강 까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거야말로 꼭 필요한, 배워봄직한 삶의 기술이라고 여겼다. 이어지는 감촉은 입 안에 감도는 생강차의 쌉싸름한 향과 따끈한 컵의 무게.


유난히 생강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하고 문득 지금껏 한 번도 연결하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까 나에게 생강은 삶에 꼭 필요한 기술이 맞다. 오늘 아침 8시부터 잡혀있는 회의에서 답변할 내용을 구상하거나, 어제 새벽까지 매달려 있던 인터뷰 준비보다는 생강을 반들반들하게 까는 일이 더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브런치에 글을 쓴 지가 몇 달이나 되었고 그렇게 좋아하던 요가를 못 한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 나는 내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했어야 하는데 미처 하지 못한 일들에 쫓기고 있다. 하지만 내 삶에, 반들반들 말끔하게 벗겨낸 생강을 얇게 저미는 일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떠오르는 상념(그게 난데없는 생강일지라도)을 일기장에 끄적거리거나 오래 묵은 인상들을 여러 번 고쳐 써 브런치에 올리는 일이다. 글을 쓰지 않는 일상은 마치 흙더미를 덕지덕지 달고 봉지에서 막 나온 생강더미 같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 그게 나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몇십 년째 깨닫지도 못한 채 손가락 끝에 남아있던 맨들한 생강의 감촉이 다시 쓰기 시작하라며 나를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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