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텔은 없다

현실 속 영웅의 빈자리

by 채정완
빌헬름 텔은 없다_acrylic on canvas_27.3X22.0_2025.jpg 빌헬름 텔은 없다 Wilhelm Tell Does Not Exist, acrylic on canvas, 27.3X22.0, 2025

스위스의 빌헬름 텔 설화는 압제자의 명령으로 아들의 머리에 올려진 사과를 활로 맞혀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그 장면은 인간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권력의 폭력성과 그 폭력을 극복하는 개인의 용기와 저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설화에서 텔은 기적적으로 과업을 성공시키고, 이후 폭정을 무너뜨리는 영웅으로 자리 잡는다. 이 이야기는 1804년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으로 재탄생하며, 스위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소비되었다. 혁명과 독립, 저항의 순간마다 빌헬름 텔은 불려 나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빌헬름 텔은 실존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설화는 집단적 상상력의 산물이고, 영웅은 현실의 인물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허구적 장치였다. 우리는 여전히 이 같은 영웅 서사에 의존한다. 누군가가 대신 화살을 쏘아주길 기대하고, 누군가의 용기와 희생으로 세상이 변하길 바란다. 하지만 영웅의 존재를 믿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미룬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헬름 텔은 없다'는 이 허구를 작품 속에서 철저히 해체한다. 작품 속 인물은 머리에 사과를 올린 채 이마 정중앙이 화살에 꿰뚫어져 있다. 설화 속 기적의 명중은 이 작품에서 정면으로 부정되고, 관객은 성공이 아닌 실패의 순간을 목격한다. 이 인물은 더 이상 구원자나 전설의 사수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영웅 신화가 끝내 구해내지 못한 존재이다. 검은 양복 차림의 익명적 인물은 문제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누구도 이 상황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영웅을 기다리기만 하는 사회가 끝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시각적으로 압축한다.


현실에서 변화를 만드는 힘은 초월적 인물에게 있지 않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은 국민 각자의 선택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행동을 미루는 대가는 결국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한다. 이 작품은 영웅의 부재를 선언함으로써,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우리의 태도를 비판하고 스스로 행동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빌헬름 텔은 없다'는 영웅을 해체하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여전히 누군가가 대신 싸워주길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사과를 내려놓고 본인 스스로가 화살을 쏠 준비를 할 것인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