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까? 말까?’
집 앞 슈퍼에서 시원한 커피 하나만 사가고 싶었다. 스타벅스 커피도 아니고 편의점에서 파는 2+1짜리 커피 말이다.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내 머릿속은 온통 커피 생각으로 가득 찼다. 집 앞 슈퍼에 다다르자 내 발은 자연스럽게 슈퍼로 들어갔다. ‘아 시원하다.’ 에어컨은 정말 대단한 발명품이라 생각하며 냉장고 앞에 서서 어떤 커피를 살까 훑어봤다. 일단 가격부터 보고 제일 싼 물건에서 내 시선이 멈췄다. 그리고 그냥 돌아 나와버렸다.
전생에 대체 무슨 죄를 졌길래 990원짜리 커피 한 잔을 마음 편히 사지 못하고 돌아 나와야 하는 것인가. 이 더운 날 커피 한 잔도 아까워 발길을 돌리는 30대 중반의 여성은 ‘집에 가서 물 마시면 되지. 그 돈이면 믹스가 3 봉지야’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빈손으로 슈퍼를 빠져나왔다. 겨우 ‘먹고 싶다’는 이유로 내 입에 들어가 없어질 커피 한 잔을 990원씩이나 주고 살 수는 없었다.
우리 집 경제 상황은 그랬다. 생존에 필요한 소비를 해야만 하는. 그래서 그런 건지 타고나길 차분한 건지 아이들은 슈퍼에 가서 과자를 덥석 집어 들거나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쩜 저렇게 착하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괜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처럼 애써 처음 겪어 보는 가난이 젊을 때 찾아와 줘서 오히려 고맙다 말했다.
하지만 가난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닌 건 확실했다.
당시 방영된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나오는 고래를 좋아하던 소녀는 우리 큰아들과 동갑이다.
방송을 보는 내내 그 아이의 부모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저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
아이에게 수많은 경험을 시켜 줄 수 있는 저들과 난 어디서부터 다른 거지?
가난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들. 부러움의 끝에는 아이들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안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집 애들은 이제 영유를 보내기 시작하는구나. 영유는커녕 유치원도 못 보내서 어린이집을 보내면서도 동네 영어유치원 목록을 적어보고 각 기관의 장단점을 살피고 있었다. 누가 보면 진짜 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어머니, 둘째 아이 언어 능력은 상위 1% 정도예요. 자랑하고 다니셔도 되겠어요”
20개월 즈음 영유아 검진에서 소아과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 서울대라도 들어간 듯 한동안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가 내려오질 않았다.
전문가의 의견이 한 스푼 더해지자 요리보고 조리 봐도 내 새끼는 똘똘해 보였다.
이런 아이들에게 부족한 엄마인 것만 같아 도서관에 있는 수 십 권의 육아 서적을 해치우듯이 읽어나갔다.
돈이 없다고 포기 한 건 990원짜리 커피 하나로 족했다.
돈 때문에 서점이 아닌 도서관을 매일 갔다. 거기서 내가 찾은 답은 엄마표였다.
교육에 욕심 많은 내가 아이들 영어를 안 시킬 순 없고 학원을 보낼 수 없으니 선택의 여지없이 엄마표 영어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표라는 것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때의 아이들이 벌써 중1, 초6이 되었다. 엄마표의 정의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집은 아직 엄마표를 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십 년 전처럼 천 원짜리 커피를 살까 말까 망설일 정도의 가난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아이들 학원비가 무서워 엄마표를 하고 있다.
등 떠밀리듯 엄마표의 세계에 들어와 보니 엄마표의 성패는 아이와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와 관계를 망치는 시점부터 엄마표의 의미가 바래지고 부모와 자녀는 원수가 되고 만다.
나 또한 큰아이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엄마표로 성공했느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감히 성공하는 길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엄마표의 성공이 우수한 입시 결과라면 장담할 수 없겠지만 내가 하는 엄마표의 목표는 아이와 부모가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읽기 시작한 육아서는 이제 독서라는 형태로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취미생활로 자리 잡았다. 아이와 함께 이뤄낸 자잘한 성공의 경험들은 우리를 각자 더 성장하게 해 주었다. 중1 아들 녀석은 여전히 나와 침대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둘째는 아직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나를 끌어안는다.
가난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뭐 부자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