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을 여행하는 시크한 여자의 살림에 대한 단상
마당이라기보다는 공터를 함께 나누며 옹기종기 집 네 채가 모여 있다. 이 집들 뒤로는 작든 크든 언덕이나 뒷산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들이 배경으로 서 있는데, 거기에는 상수리나무 소나무 배나무 따위가 있어 계절마다 특색 있는 풍경을 더해 준다. 작은 산 아래쪽으로는 가을 끝무렵부터 늙은 호박이 나뒹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서 자라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 없는 호박임에는 분명하다.
앞집에 놀러갔다가 그 집 응접실 통유리창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니 커다란 호박 몇 덩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는 애호박도 있고 단호박도 있다.
누가 관리하지도 않는 찬바람 부는 노지에 그렇듯 종류별로 색색의 호박이 나뒹구는 풍경을 집에서 뒹굴다가 이웃집 여자와 하릴없이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호사로운 삶의 조건인가.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이 이웃집 여자는 나와 성향이 달라서 자기 집 창가에서 곧장 내다보이는 그 호박들의 주인임을 자처할 생각이 전혀 없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다. 나는 아기를 본다는 핑계로 올해 농삿일에 게을렀던 탓에 겨우내 저장고에 우거지 하나 시래기 하나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려 김장철 훨씬 전부터 농사 잘 짓는 어른께 우거지를 예약해 두는 여자고, 옆집 여자는 그렇게 고이 얻어서 다 삶아 지퍼백에 착 담아 놓은 냉동 우거지조차 먹을 리 없을 거 같다며 눈독 들이지 않는다.
아, 물론 우리는 둘 다 집밥을 좋아하는 여자들이다. 그 집 우리집 오가면서 나누어 먹는 정다운 밥 시간도 좋아하는 여자들이고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귀찮고 힘들어도 끙끙 하며 자꾸 되도록 원초적으로(?) 집밥을 차리려고 하는 여자인 데 반해, 옆집 여자는 팩에 든 반조리 김치찌개와 냉동 닭똥집 등을 이용한 간편한 위장술(?)로 차리는 이도 먹는 이도 서로 만족감 200퍼센트에 달하는 집밥을 차려내는 현명하고 유쾌한 여자다. 그러니 이 여자가 호박을 양보하는 것은 내가 자기 집 창가에 서서 그 호박들을 탐 나는 듯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는 것이다.
늙은 호박을 두고 옥신각신할 필요 없는, 적당히 다른 스타일의 적당히 나이 먹은 여자들의 관계란 참으로 편안하다. 양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사양이라는 말은 너무 겸손하지 않은가. 그냥 미소 한 번 지으며 "오늘 저녁 반찬 하십시오." 하며 자기 산도 아닌데 그 산을 다 줄 듯 팔 벌리는 그 여자의 제스처가 나는 참으로 좋다.
요즘처럼 각박하고 시시비비가 분명하고 계산 또한 명료한 이 사회에서 아무런 대가도 옥신각신도 없이 저녁 식탁에 올릴만한 그럴싸한 매력적인 식재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 아닌가.
그 대단한 우리집 배경에, 이웃에게...
그리고 부엌이 온전히 내 것은 아니니까... 라고 양보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남자에게 고마움을 갖게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