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을 여행하는 시크한 여자의 살림에 대한 단상
겨울 문턱에 들어서면 크리스마스이브에 어디서 무얼 하며 보낼지가 꽤나 중요한 이슈가 되던 시절을 지나 ‘어쩌다 보니 그날이 크리스마스였군.’ 하게 되는 시절에 서 있다. 20대엔 20대가 지나버리면 좋은 것은 다 끝나는 줄 알았으나 30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은 40대 중반을 기대할 줄 아는 마음이라 훨씬 좋다. 초조함도 덜하고 불안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마음도 덜하며 조바심 나게 쓸데없는 것들을 기대하며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도 점점 줄어든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꽤 이상한 조합으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자꾸 들먹이게 되는데, 겸손하게 다시 생각해 보니 내 마음은 어느 부분 여전히 청춘 어디쯤에 닿아 있나 보다) 우리 가족이 잘 알고 지내는 미술가와 앞집 가족. 크리스마스이브는 애인(삼일 전에 소개로 만난 이성이라 할지라도)이나 대략 오 년 이상 알고 지내온 누군가와 보내는 게 아니라면 가족과 조용히 보낸다는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깨고 오 년 이상 되지도 않았고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열정도 없는 덤덤한 관계의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그날 케이크를 만들었는데, 이 미술가가 간직하고 있는 한 권 책 속 레서피에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 그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들의 레서피를 모은, 불어로 쓰인 책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나를 비롯한 몇몇 지인들을 초대한 모임에서 그 책에 등장하는 레몬치즈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내가 먹어 본 케이크 가운데 가장 촉촉하고 부드러우면서 적당히 달콤했던 최고의 케이크였다.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지만 미술가가 삼 년 전쯤 만들어 주었던 그 케이크의 맛을 잊지 못하고 있던 나는 올 겨울에 케이크를 만들러 가겠다고 장담했고, 그 자리에 내 이웃이 동행한 것이 그날의 별난 조합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우리는 정성스럽게 케이크를 만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대로 된다’는 것은 우리의 결심과는 달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시에 케이크 세 개를 만들겠다고 달려든 여러 손들. 한쪽에서는 레몬을 씻어 제스트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달걀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고, 또 한쪽에서는 치즈를 썰고……. 스펀지 시트를 만드는 세 개의 케이크볼 안에서는 서로 다른 역사와 열정들이 중구난방으로 반죽되고 있었다.
한 개가 아니라 세 개다 보니 계량도 차례도 그릇이나 반죽을 만지는 손의 온도도 모든 게 다 조금씩 달라졌다.
와인을 기울이며 서너 시간쯤 수다를 떤 뒤 냉장고에 넣어 둔 케이크를 꺼내어 시식을 하는데,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케이크가 무너져 내렸다. 이런.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나름 길었던 그 시간이 케이크가 적당히 굳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던 것이다. 맛도 무너져 내린 모양과 다름 아니었다. 우리는 그날 사전 준비가 부족했고, 자꾸 삼등분을 했으므로 꼭 지켜야 할 레서피를 지키지 못했고, 많이 서둘렀다.
미술가의 철학은 레서피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내 요리하는 동생의 철학은 레서피는 칼 같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사이에서 아무런 주의도 철학도 가지지 못한 채 끼어 있던 나는 누구보다도 집에서 많이 밥을 차리지만 타인의 부엌에서 어떤 순간에도 어떤 영역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배앵뱅 겉돌고만 있었다.
내 부엌으로 돌아와 그날의 망친 케이크를 냉동실에서 꺼내어 보자니 배시시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나는 케이크 만들기에 있어 미술가의 철학보다는 내 동생의 철학 쪽에 가까운 편인 것 같다. 정확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고, 다음엔 계량도 차례도 아주 칼같이 지켜서 제대로 해 봐야지 생각한다.
서두른다는 건 서투르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사랑도 그랬던 것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망친 케이크는 정확한 레서피를 통해 다시 완벽한 케이크로 수정 가능하지만 사랑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 사랑에는 청춘에는 애초에 레서피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구속될 것이 없어서 거칠 게 없어서 그래서 수정 보완해야 할 일이 없어 홀가분하다고 할 수도 있을까? 그런데 왜 지나버린 것들에는 늘 미련이 남는가. 왜 고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일에도 늘 미련이란 놈이 따라다니는 걸까.
망쳐버린 케이크를 다시 만들듯 다시 다듬고 싶은 청춘의 사랑이 아른거린다면, 가끔 잠 못 이루지 못하는 밤 그 미련에 여전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을 때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망쳐버린 케이크 한 스푼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혀끝에 놀랍게 남는 절대적인 단맛의 여운에 잠시 아쉬운 마음 따위 잊는다. 망쳐 버린 모든 것들에도 고유의 것을 잃지 않고 제대로 남아 있는 원소 같은 것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잠시 목 뒤가 짜릿하다. 그러니까 어쩌면 망쳤다는 것은 관계 맺고 규정 짓는 습관에서 오는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다 괜찮은 거다.
게다가 ‘다음엔 더 잘 해 봐야지.’ 이런 결심 가능한 일이 있다는 것은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 일인가. 끝나버린 지나버린 사랑과 달리, 다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 균형을 가져다주는 대단한 일이다. 참으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