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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24. 2022

14. 우리 옛것과의 만남

조선의 직업군

놈 · 놈 ·      


책 읽어주는 

“자네 들었는가, 종로의 절초전(담배를 잘게 썰어서 파는 상점) 앞에서 ‘그’가 목숨을 잃었다네. <임경업전>에서 역적 김자점의 무고로 임경업이 죽게 되는 대목에서 구경꾼 중 한 명이 칼로 ‘그’를 찌르며 “네가 김자점이렷다!” 소리를 쳤다고 하는군.” 

실로 어이없는 죽음이 정조실록(1790년 8월 10일 자)에 기록되어 있다. 

부풀려 말하자면 18세기 조선이 궁궐에서 지방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소설을 즐기지 않는 곳이 없었기에 발생한 일이다. 당시 서울 도성 안에는 세책점(貰冊店 책 대여점) 15곳이 성업 중이었다. “소설을 돈 주고 빌려보는데 깊이 빠져 집안이 기운 자도 있다.” 실학자 이덕무는 혀를 찼다. 그러나 대부분 문맹인 일반 백성이 세책점을 들락거리기는 만무한 일, 소설책을 읽어주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전기수傳奇叟가 생겨났다. 전기수는 사람들이 많은 일정한 장소를 정기적으로 순회했다. 지금의 종로를 6일 간격으로, 제1교, 제2교, 배우개(梨峴), 교동 입구, 대사동 입구, 종루의 순으로 오르내리는 식이다. 이들은 낭독하다가 사건이 긴박해지면 갑자기 읽기를 멈추었다. 다음이 궁금한 청중들이 돈을 던졌으니 전기수의 이러한 돈 버는 요령을 요전법徭錢法이라 한다. 청중의 반응에 따라서 음성의 고저와 억양을 능수능란하게 바꾸고 몸짓을 곁들여 낭독을 실감 나게 했다. 전기수의 열연은 당대 최고의 오락거리로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와 이야기 속 인물을 혼돈한 청중이 사달을 일으킬 정도였던 것이다. 

전기수 문화는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장시에서 소설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경우 말고도 소설책을 팔기 위해 장바닥에 판을 펼친 상인 낭송자, 부유한 부녀자를 대상으로 가정을 드나든 낭송자, 마을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낭송자 등 다양한 형태였다.            


흥정 붙이는 

가: 천불대天不大요? 

나: 인불인仁不人이요.

가: 그럼, 조불백皂不白은 어떤가. 

나: 아니오, 욱불일旭不日로 합시다. 

가: 으흠, 태불윤兌不允으로 하세나?

우리말인지, 외국어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말들은 변어邊語라 한다. 일종의 암호로 천불대는 1(天에서 大를 빼면 一), 인불인은 2를 뜻한다. 같은 방식으로 조불백, 욱불일, 태불윤이 7,9,8 임을 알게 되면 과연 이렇게 숨겨진 숫자들이 어떻게 사용되었을지 감이 올 것이다. 

조선은 성곽과 궁궐을 건설하면서 종로 거리에 시전행랑을 만들었다. 건물들은 1층은 상점, 2층은 창고의 구조로 주인은 최소한의 상품만을 진열하고 퇴청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렸다. 

“경시서(京市署시전을 관리, 감독하는 관청)에서 각 상점의 이름을 판자에 쓰고, 판매하는 물품을 그 아래에 아울러 그려서 각 처소에 걸어 서로 섞이지 않게 하기를 청하였다.” 태조실록(1394년 1월 18일)

그렇지만 '조선의 만물상'인 종루 육의전의 바닥은 한바탕 둘러보는 데만 종일이 걸렸으니, 천여 칸이 넘는 행랑에서 원하는 물건 찾기는 ‘검불 밭에 바늘 찾기’였다. 자연스레 물건을 사고파는 자의 틈새를 파고드는 직업이 등장했다. 바로 여리꾼이다. 

“큰 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육의전) 여기로다.

 일 아는 열립군列立軍과 물화를 맡은 시전 주인은

 큰 창옷에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 달고

 사람 불러 흥정하니 경박하기 끝이 없다.” 1844년 한산 거사가 쓴 <한양가>

남은 이익(여리餘利)을 챙긴다는 뜻도 있지만 상점 앞에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열립군에서 유래한 명칭인 여리꾼. 눈에 띄는 옷차림과 매끈한 말솜씨로 무장하고 손님과 상점 주인 사이의 거래를 성사시켜준 후 대가를 받았다. 손님 모르게 가격을 조정하기 위해 독특한 변어를 썼던 것이다. 큰돈이나 거처가 필요 없고 신용과 인맥, 부지런함을 겸비한다면 입에 풀칠은 가능한 프리랜서였으나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사기꾼 인상을 주어 비하되기 일쑤였다.

     

낮에는 공무公務밤에는 황제인 

“발승암은 기사騎射에 능해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기생 둘을 끼고 몇 장의 담을 넘을 만큼 힘이 세고 녹록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집안이 본래 부유하여 재물을 분토糞土처럼 쓰고... 천금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언제나 준마와 명응名鷹을 좌우에 두었다.”  

한 시절 강남에서 향락적 소비를 일삼은 오렌지족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 연암 박지원의 <발승암기>에 나온다. 연암은 ‘머리를 기른 중(髮僧菴)’이란 범상치 않은 호를 쓴 자를 방탕하고 어리석다는 의미를 담아 ‘활자(闊者 왈짜)’라 칭한다. 

팔자가 늘어졌다 싶은 패거리, 왈짜. 그들 모두가 발승암 같이 무반, 양반 출신은 아니었다. 경아전(중앙관청 하급관리), 포도청 포교, 의금부 나장, 승정원 사령, 대전별감(임금 주위에서 잔심부름하는 사람), 무예별감(임금의 호위무사)... 양반도, 상민도 아닌 중간계층이 주축이었다. 요샛말로 금수저가 아닌 그들이 ‘돈 쓰기를 똥이나 흙처럼’ 한 것은 놀고 마시는 유흥 공간, 기방을 활동무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왈짜는 서울에 올라온 지방 출신 기생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고 기생의 영업으로 발생하는 이익의 일부를 차지했다. 기방의 고객이기도 한 왈짜는 기생과 직업 음악인에 해당하는 가객, 금객 등을 불러 모아 춤과 노래, 기악을 아우르는 큰 공연 판을 벌였으니 민간 예능의 기획자이자 향유자이기도 했다. 

신윤복은 <혜원 전신첩>에서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세련된 색상 조합의 레이어드룩과 장식구를 단 왈짜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붉은 단령에 파란색 허리띠를 매고 노란색 초립을 써서 화려하고 맵시 입게 치장한 별감이다. 왈짜는 복식의 사치와 유행을 주도하며 시정의 유흥공간을 장악한 조선 후기의 ‘투잡족‘이었다.  


전기수, 여리꾼, 왈짜,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는 신분제 사회의 ‘마이너리티’.

종로를 거닐며 그들 삶의 현장인 운종가를 그려본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옛 영광을 알리는 표지석과 투명한 발판 아래의 유구가 눈물겹게 반갑다. 고군분투했던 그들이 잊히지 않으려 여전히 애쓰는 듯 느껴진다. 책 읽고, 호객하고, 호령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높다란 빌딩 사이를 스치는 바람결에 실려 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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