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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24. 2022

15. 우리 옛것과의 만남

'고려 철불'에 대하여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손녀를 위해 절에 등을 달고 기도를 하실 거란다. 30년도 훨씬 더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남매의 대학 입학시험 날이면 어머니는 108배를 올리셨다. 멍이 들어 시커멓던 어머니의 무릎이 눈에 선하다. 고기 먹고 파리, 모기 잡았는데 기도발이 들겠냐며 투덜대곤 했었다.

오래전 그때나, 지금이나, 철없는 건 똑같구나 싶어 진다. 불교조각실에서 이리저리 생각의 고리를 이어간다. 

    

주존불로서 대웅전, 약사전, 대적광전 등의 전각에서 화려한 탱화를 배경으로 장엄한 수미단 위에 계셨던 분들을 한 자리에 모셨다. 시대와 지역을 넘나드는 깊고 넓은 인연이다.

같은 지붕 아래 오순도순 지내고 계신 여래상과 보살상을 바라보다, 주인공을 과장해서 크게 그리는 전통회화의 표현법이 생각났다. 혹시 현존하는 철불 중 최대인, 경기도 하남시 폐사지에서 발견된 철불께서 대장 노릇을 하시려나, 불손한 궁금증을 누르며 올려다본다. 결가부좌한 다리를 풀고 일어서시면 어쩌려나, 싱거운 상상도 한다.

광주 하남 하사창동 출토 철조 석가여래좌상

한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와 무릎 앞 부채꼴의 옷 주름, 수인이 석굴암 본존불과 같다. 그런데 밝은 화강암이 아닌, 높이 2.88미터, 무게 6.2톤에 이르는 거칠고 시커먼 ‘무쇠’는 부드러운 미소를 거둬들여 무심한 듯 시크하게 보인다. 

여래의 온몸은 금빛이기에 불상 제작 시 채색이나 개금이 원칙이다. 이를 보여주듯 금박을 입히기 전 처리였을 옻칠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황금빛의 거대한 불상으로 눈부신 카리스마를 지니셨을 텐데 발원자는 누구였을까.

학계에서는 철불을 조성한 세력가로 철불 발견지인 고려시대 행정구역상 광주廣州을 장악했던 호족을 주목한다. 태조의 16번째 비가 낳은 왕자 광주 원군廣州院君의 외조부 왕규王規다. 이에 따라 그의 활동 시기인 10세기 전반을 불상의 제작시기로 본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던 철불은 현재 50여 예가 알려져 있다. 여타 재질의 불상이 전국에서 발견되는 것과 달리 주로 중부지방에 분포한다. 

흔히 철불은 선종 세력이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아 불사를 주도 하면서 만들었다고 알려져 왔다. 실제 철불의 조성 시작이 선종 선문의 개창 시기와 같고 선종 사찰에 철불이 많기는 하지만, 이러한 연관성의 사상적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상의 파격성을 생각해보면 철보다 더 어울리는 조형 재료는 없다고 느껴진다. 교종 중심의 기성 체계에 도전하며 누구나 수행하고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선종사상, 그리고 강도가 세고 내구성이 커서 인류에게 단단한 농기구나 강력한 무기를 선사한 철. 인간의 삶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두 ‘발명품’의 강렬한 조합이다.      

근래에는 철불이 지방 세력의 전유물만은 아니었음도 밝혀졌다. 

철원 도피안사 철불은 지방 향도가 중심이었지만, 보령 성주사의 철불은 문성왕文聖王의 원불願佛이고, 보원사普願寺 철불은 광종光宗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장흥 보림사와 남원 실상사 철불도 신라 왕실이 후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저물어가는 신라 하대나 중앙 집권력을 갖추지 못한 고려 초기, 왕실은 절을 창건하여 선승을 모셔오고, 지역민의 마음을 끌어 모으려 했던 것이다.   

  

철불의 탄생은 동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한 상황에서 철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주요 철 산지와 조운로漕運路로 연결되어 상대적으로 철에 대한 접근성은 높았기에 가능했다. 국내에서는 낯선 재료였지만 중국에서는 성당기盛唐期부터 철불이 유행이어서, 귀국한 유학승에게는 동의 대체품인 철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점도 들 수 있다. 또한 풍수지리의 비보 사상과도 관련이 깊다. 철불이 터를 진압하여 사찰을 수호하고 안정화시킨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보다 비용이 저렴하고 소조보다 견고하며 목조나 석조보다 빨리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경제성과 실용성도 나말여초 ‘핫 아이템’, 철불의 조성에 큰 몫을 한다.  


사회적 혼란기에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대규모 불사가 이루어질 때, 이를 뒷받침한 것은 최첨단의 기술력이다. 어떤 금속보다 녹는점이 높아 추출하기 어려운 철은 금보다 더 귀한 금속, 흑금黑金이라 불렸다. 다루기도 까다로워 수많은 경험이 축적되어야 철불의 제작이 가능하다. 철불은 철제 원통을 대나무 모양으로 쌓아 올린 철 당간, 보은 법주사와 논산 개태사의 거대한 철확(무쇠솥)과 함께 사찰에서 발원한 불사가 주조 기술 발달을 견인하였음을 보여준다.     

철불은 크기 때문에 여러 판을 결합시킨 거푸집으로 주조한다. 판과 판의 이음새에 쇳물이 흘러든다. 얼굴 정면을 제외한 턱선이나 옷 주름을 따라 형태를 분할해서 흔적들을 감추려 공을 들여도 또렷이 보인다. 이마, 가슴과 허리, 무릎, 등에 남은 선들이 얼핏 벌어진 상처의 봉합선 같다.

양식적인 분석을 통해 철불의 시원적인 형태로 알려진 전북 남원시 실상사 약사전 철조 여래좌상의 경우 무려 38면 분할이 확인되었다. 당대 장인에게는 기술적 한계로 여겨져 실망감을 주었겠지만 현대 우리에게는 철의 괴량감과 함께 독특한 조형미로 느껴진다. 


그런데 충남 서산시 보원사지 철불은 도드라진 분할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다. 고려의 화엄종 최초 국사인 탄문坦文이 10세기 중반 조성한 불상으로 육계에는 녹색 칠이 곱게 남아 있다. 앉은키 2.57미터에 이르는 큰 체격인데 입을 앙 다물고 뾰로통해 계신다. 두 손을 잃고 텅 빈 채 남아 있는 손목을 보니 아픔을 참고 계신 듯도 보인다. 거기다 서산 마애삼존불과 가까웠던 원래의 자리가 사무치게 그리우신 건가. ‘신라 말 고려 초의 철불은 호족의 자화상’이란 표현이 딱 맞다 싶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 듣는 노모의 이러저러한 당부가 새삼 마음을 흔들고 지나간다. 한숨을 삼키면서도 설렁설렁한 태도를 매만지게 된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소리를 듣던 아버지와 남편 때문에 “복장이 터진다.” 하시던 어머니, 두 분 덕에 어릴 적부터 낯설지 않았던 부처님들에게 마음의 소리를 전해 본다. 

‘천년 넘게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으니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하시겠네요, 그런데 나중에 시간 나시면 제 부탁도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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