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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24. 2022

16. 우리 옛것과의 만남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일상으로의 초대 

    

전시장 초입 19세기 <한성도>, 동서를 가로지르는 물줄기와 잎맥처럼 퍼진 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도 서울의 젊은 시절 초상은 둥그렇게 손과 손을 맞잡은 크고 작은 산들을 부채처럼 펼쳐 놓았다. 거칠 것 없이 시원스러운 전경에 현재 서울의 골격이 그대로 겹쳐진다.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전에서 어릴 적 서울구경을 손꼽아 기다렸던 일을 떠올렸다. “시내 나간다.”는 말을 일탈과 색다른 체험의 기회로 여겼을 때 이야기다. 꼬맹이의 가슴 벅찬 기대는 오래전 도성 밖 사람들의 도성안 사람들에 대한 선망과 다르지 않으리라. 우리처럼 태어나고 자라난 도시의 성장앨범에 옛 기억도 꺼내보며 한양이라 불렸던 시절로 가까이 다가섰다.     


미술도시를 이야기하다

<청명상하도>·<고소번화도>·<낙중낙외도>·<태평성시도>가 한자리에 모여 동아시아 3개국의 독특한 미감을 뽐냈다. 10m 길이 이쪽, 저쪽에 이르는 수묵채색 두루마리 2점은 기다랗게 눕고 이를 지켜보듯 병풍 3점이 둘러서서 널찍한 공간을 오롯이 채웠다. 대륙에서는 명·청대 강남서 가장 번성한 도시인 소주를 배경 삼고, 섬나라에서는 천년고도 교토의 풍광을 담아 도시의 발전상을 과시했다. 웅장한 테마파크 수십 개 단지를 무대 삼아 영화 수백 편을 동시다발적으로 촬영하는 현장이라고나 할까. 셀 수 없이 수많은 도시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눈으로는 줌인·줌아웃을, 마음으로는 재생·일시정지·되감기를 하며 환상적인 세상에서 머물렀다.      

정치, 군사, 행정중심지 한양의 성격이 크게 변모한 때는 17세기 후반이다. 봉건적 권위 대신 경제적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상업도시로의 역동적인 성장에는 골치 아픈 일들도 따랐다. 홍수 피해와 주택 부족, 도시빈민과 경제범죄의 증가 같은 도시문제들이다. 21세기 미디어의 헤드라인에 자주 등장하는 난제들의 뿌리는 그렇게 깊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서울에 대한 배경지식을 얻고 18세기 <태평성시도> 앞에 서면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거리에 가득 찬 인파의 활기가 실감 나서 시끌벅적하게 들려오는 듯했던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8폭 병풍을 ‘그땐 다 그랬구나.’ 하는 시대의 기록에서 ‘항상 이렇게 살고 싶어.’ 하는 지금도 변함없는 사람들의 염원으로 읽어보게 된다. 

우리의 <태평성시도>와 달리 실제 경관에 근거한 중국의 국보급 유물 <청명상하도>와 <고소번화도>, 일본의 <낙중낙외도> 역시 어디에도 없는 이상향, 유토피아의 구현이란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배 세력이 바뀌어도 꾸준히 제작된 것은 지난 왕조의 부패나 스러진 영광을 기억케 하여 역사적 본보기로 삼으려는 정치적 의도도 다분하다고 한다.


도시와 미술의 교차점에는 <화성전도>도 자리한다. 문신들에게 한양의 전경을 담은 <성시전도>를 보고 장편시를 써내라 명할 때 정조의 꿈이 시작되었을까. ‘소리가 있는 그림 같다(有聲畵)’, ‘말로 풀어놓은 그림 같다(解語畵)‘ 하며 시를 논할 때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 화성의 청사진이 함께 그려진 것은 아닌지. 군신이 함께 한 조선 판 서울찬가의 제작에 이은 신도시 건설은 조선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안정과 번영기가 낳은 역작이다. 시대를 앞선 축성 기술과 정책의 실시를 글과 그림으로 고스란히 담아낸  『화성성역 의궤』는 미술 속 도시가 가상이 아닌 실재임을 증언한다. 

     

도시미감과 자의식을 새로이 하다

상업도시 한양에서 부를 축적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게 된 역관과 의관 등의 기술직 전문가와 하급관료들. 서얼과 함께 중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서화 슬파 수집, 고동완상의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예술을 향유하고 후원하기 시작한다. 사대부의 고아한 아취와 구별되는 그들만의 미의식이 형성되고 독자적인 ‘여항 문화’가 탄생한다. 

이번 전시 포스터에 등장한 <수계도>는 여항 문사들의 높아진 위상을 자랑하는 여러 인증샷 중 하나다. 시사와 계회 활동을 즐기고 있는 참석자 30명의 자세와 생김새가 모두 다를 만큼 세밀하고 사실적이어서 실재감이 드는 한편 여리여리한 필선과 유난히 환한 바탕색 때문인지 신선들의 세계처럼 몽환적인 느낌도 든다. 화가 유숙의 ‘포토샵‘ 비법이 궁금하다.


달라진 도시 미감은 독립된 전시공간의 홍백매도 병풍 4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희룡, 유숙, 장승업의 홍매, 백매가 연출해내는 장관을 어떻게 말로 옮길 수 있을까. 하늘로 치솟는 용과 같은 나무기둥과 몰아치는 번개처럼 뻗어나간 줄기의 기운생동이 마음을 부여잡고 요동치게 한다. 가지마다 소복한 매화꽃은 또 어떠한가, ‘은하수에서 쏟아 내린 별무늬’처럼 눈부시고 ‘오색 빛깔 나비’처럼 화사하다. <홍백매도>가 보여주는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화법이 꽃 내음이 가득한 봄날을 선사한다면 <책가도>와 <호피장막도>는 초현실적 세계로 순간이동을 시킨다. 

묵직한 서책 더미를 비롯한 온갖 진귀하고 값비싼 사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커다란 서가에 가득해 화면에 빈틈이 없다. 개별 사물은 모두 실제 같은데 전체 조합은 꿈도 현실도 아닌 신비로운 세상이다. 

물질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의 표현에는 <백납병>과 <백선도>가 빠질 수 없다. 원, 사각, 부채모양에 산수, 화조, 괴석, 초충, 영모, 어해를 요령껏 그려낸 후 욕심껏 챙겨놓거나, 한눈에 최고급이다 싶은 온갖 부채를 정성스레 선별해놓고는 무심한 척을 한다. 완물상지(물건을 가지고 노닐어 뜻을 잃는 것)의 유교 이념을 향해 정면승부 도전장을 내미는 것 같다.


그렇게 당돌하게 솔직한 조선 후기 도시 속 미술은 세속적이고 감각적이었다.     

전시장 말미에는 대한제국기를 지나 일제강점기에도 폭풍처럼 밀려온 근대화의 산물들이 자리한다. 옛것과 낯선 것의 충돌 속에서도 사진, 인쇄술, 전차 등의 신문물이 일상으로 들어오고 미술도 변화의 조류에 올라탄다. 종이나 비단에 먹이 아니라 캔버스에 유채인 자화상 5점이 전시장 길목에 나란하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식민지 도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일까, 유학생 화가들의 깊은 눈빛이 우리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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