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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27. 2022

22. 우리 옛것과의 만남

신과 함께

동자 연가童子 戀歌     


길손이에요. 동화 『오세암』의 주인공이랍니다. 작가는 폭설로 고립된 사찰에서 홀로 겨울을 보낸 오세동자 설화를 토대로 제 이야기를 지으셨지요. 

저는 누이가 보고 싶고 바람 소리가 사나워질 때마다 스님의 당부대로 했어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얼마나 관세음보살을 소리 내어 찾았을까요. 어느새 그리움과 두려움, 배고픔까지도 사그라졌어요. 눈이 녹아 길이 트이자마자 찾아온 사람들은 제가 머문 암자에서 맑은 독경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았다고 해요. 백담사의 관음암觀音庵을 중건한 후에 오세암五歲庵이라 부르며 당시 다섯 살이었던 저의 성불을 기리고 있지요.

고요와 암흑만이 가득한 날들 동안 엄마의 품 같은 온기를 담아 저를 안아주고 토닥거려준 손길은 관세음보살의 가피加被(부처나 보살이 중생에게 힘을 주는 일)였어요.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갸웃거리는 분도 계시네요.

저보다 더 유명한 친구 이야기도 들어보세요.     


관세음보살과 함께

제 친구는 멀고 먼 남인도 해안가까지 구도의 길을 떠나요. 험준한 보타락가산의 높은 바위 위에 반가부좌 한 채로 선정에 든 보살을 만나기 위해서지요. 보살은 관음의 서른셋 변화신 가운데 한 분으로 ‘물속의 달’, 수월이에요 하늘의 달이 일시에 천 개의 강에 나타나듯 보살의 청정한 법신이 온 세상에 그득하고 자비가 온 세상을 고루 비춤을 뜻해요. 

친구는 누구든지 부르기만 하면 어디서든 나타나는 친근한 존재, 관세음보살을 또렷이 목도하였답니다. 선재善財란 이름은 어머니의 몸속에 머물 때부터 집안 가득 온갖 보물이 가득해서라고 하지요, 

극적인 만남의 기록화인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에는 수반을 갖춘 정병만큼 자그마한 친구가 일렁이는 물결의 끝자락에 자리해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워요. 아미타불이 새겨진 보관을 높이 쓴 수월관음은 어깨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린, 섬세한 색색의 문양과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옷 위로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비단을 둘렀어요. 다소곳한 자세로 보살을 우러르는 친구의 얼굴을 보세요.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거대한 수월관음에 의구심이나 위협감을 느낀 흔적이 전혀 없어요. 저도 암자에 머물렀던 관음보살과 생김새와 옷차림은 다르지만 자비로움과 부드러움은 같다고 느껴요.     

선재동자는 선지식善知識(수행자들의 스승) 중 28번째로 수월관음을 친견한 후에도 계속해서 천하를 역방歷訪(여러 곳을 차례로 방문함)하여 마지막 53번째로 보현보살을 만나요.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 국토에서 왕생하고 ‘구도의 아이콘’으로 존중받지요. 선재동자의 구법 행각은 산수를 찾아 유행遊行하며 심신을 연마한 화랑의 수련이나 중국에서 귀국하여 낙산사를 창건한 화엄종의 개조開祖, 의상義湘의 역정에 영향을 끼쳤데요. 어른에게도 벅찬 막중한 임무였기에 친구의 위업을 생각할 때마다 어깨를 으쓱거리게 돼요. 

그런데 선재동자 같은 어린아이가 언제부터 승단에 들어왔을까요. 알아보니 불교의 시원에 닿아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네요. 붓다의 아들 라훌라가 출가한 이후 부모가 동의하면 네 살에서 여덟 살 아이들도 스님들과 생활하고 수행했다지요. 범어로 구마라 또는 구마라카라, 한자로는 동진童眞이라 해요.  

   

수월 관음과 선재동자(왼쪽 아래)


지장보살과 함께

부처님 오신 날, 예불 시간이면 졸음에 겨워 오뚝이처럼 흔들거리는 개구쟁이 동자승이 기억나시지요.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해서 천진불天眞佛(진리를 인격화한 법신불)과 다름이 없다지만 실제 동자승이 아닌 단기출가 체험 중인 신도의 자녀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러면 동자의 조형물인 동자상이라도 찾아볼까요. 숨바꼭질 놀이하듯 전각을 열어가다 의외의 장소에서도 동자상을 보게 되네요. 명부전, 죽은 이의 넋이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곳이니 어린아이가 머물 곳은 아니다 싶은데, 어떤 연유일까요. 

조선시대 불교가 중국의 도교와 습합 하는 과정에서 본존인 여래如來를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협시 형태가 불교 존상의 시동侍童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요. 명부전 안에 보통 적게는 2구, 많게는 12구의 동자상이 배치되어 있네요. 

명부전의 주존은 천상에서 지옥까지 이르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성불을 미룬 대자비의 보살, 지장보살이에요. 원래 사십구재 의식과 밀접한 시왕이 자리했는데 임진왜란 후부터 지장보살이 모셔졌다고 말해져요. 그런데 전쟁 이후 민초의 삶을 생각해보면 지장보살이 직접 명부전을 찾아 들어왔으리라 싶기도 해요. 스러져간 무수한 목숨들과 고난 가득한 당시 상황에 저려오는 마음을 안고 분연히 일어났을 모습이 그려져요. 

그러면 명부전에 들어온 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할까요. 그들이 공손히 들거나 안고 있는 지물들에 눈이 가요. 붓·벼루·두루마리의 필기구, 연꽃이나 연잎, 온갖 과일, 학·봉황·호랑이·기러기 등 참 많지요. 짐작에 공부를 하다 동물과 뛰어놀고 공양도 하려니 싶어 져요. 속마음을 읽었는지 옅은 미소를 띤 동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건네요. 사람들의 살아생전 행적을 기록하고 보관했다가 시왕에게 보고하거나 판결을 기록하느라 바쁘대요.

‘선을 증명하는 동자는 매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귀를 기울여 선을 닦음을 들으면 조그마한 것이라도 기록하지 않음이 없으며, 악을 증명하는 동자는 음향이 소리에 따라 일어나듯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면 조그마한 악이라도 기록하지 않음이 없다.’ 동자의 소임이 지장보살에 대한 경전에 자세히 적혀 있었네요. 

역사의 편찬을 위해 초고草稿를 쓰는 사관史官의 모습과 겹쳐져요. 선악 동자들이 지녀야 할 엄정함과 삭여야 할 고단함이 커다랗게 다가와요.   

명부전의 동자상. 국립중앙박물관

  


동자를 노래하다

불교의 세계에서 동자는 구법자, 공양자 그리고 시동 일까지 맡았다고 알게 되었어요. 현세적인 관음신앙과 내세적인 명부 신앙의 득세가 달라졌듯 동자 역시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역할이 바뀌고 표현의 차이가 생겨났네요.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 안 들고 청정 범해 닦고 닦아  

  서리같이 엄한 계율 털끝인들 범하리까.”  

동자의 순수한 심성을 노래하는 발원문發願文으로 이야기를 마치려 해요.      

아참, 궁금한 것이 있어요. 누이는 어른이 되면 동심을 잃는다고 했어요. 영원히 다섯 살이어서 다행이다 했는데 ‘늙으면 아이 된다.’는 말도 있네요. 그럼 나이를 먹는 게 좋은 건가요, 아닌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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