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나 Feb 27. 2022

23. 우리 옛것과의 만남

국립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

금속열전金屬列傳      


“유레카!”, 오래전 그리스에서 울려 퍼진 탄성을 떠올린다. 당시 금은 얼마나 값비쌌기에 금세공사는 감히 왕관 제작에 잔꾀를 부렸을까. ‘황금의 나라‘ 신라의 금관과 금제 허리띠는 24K일까, 18K일까. 

금속공예실에서 유물에 깃든 역사의 무게를 잠시 잊는다. 진짜? 가짜? 하는 속물적 관심이 미니어처로 만들어 갖고 싶다는 무리한 욕심까지 이른다. 

금속공예품은 멀리서부터 고고한 빛으로 시선을 끌어당긴다. 왕실과 사찰 같은 삶의 공간에서 실제 사용되었거나 부장품이었던 금속유물들이 현대미술작품 같다. 최고의 재료와 디테일의 미학을 드러내는 최상의 세공 실력으로 만들어진 공예품은 시공을 뛰어넘는 아우라를 지닌다. 누구라도 눈부신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들 것이다.  

    


최초의 금속공예품인 청동거울은 현대의 것과는 다른 운명을 지녔다. 한 면이 매끄럽지만 얼굴이 또렷하게 비춰 보일 정도는 아니다. 신과 교감하는 무구로 제사장의 징표였다. 금속을 다루는 복잡하고 전문적인 기술의 발전은 사회 조직의 구성, 나아가 권력의 형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청동거울뿐만 아니라 청동방울, 동검 같은 초기 금속이 지배층의 전유물로 실용성보다는 정치적,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이유다.   

   

인류가 가장 먼저 사용한 금속은 구리다. 화산에서 폭발해 녹아내린 용암이 굳는 걸 보고 발견했으리라 전해진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날카로운 관찰력이 문명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구리는 다른 금속과 잘 섞여 주석을 섞으면 청동, 아연을 섞으면 황동(놋쇠)이 된다. 합금은 금속의 강도를 높이면서 녹는 온도는 낮추고 산화의 속도를 늦춘다. 자연 동보다 단단해지고 가공은 쉬워진 청동이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민간에서도 사용한다고 했을 정도로 청동그릇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앙증맞은 장신구부터 집채만 한 범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된다.         


철은 흔한 금속 중 하나이지만 동보다 높은 온도에서 녹아 다루기가 어렵다. 거푸집에 부어 원하는 모양을 얻는 주조와 두드려서 모양을 만들어가는 단조 기법을 선택하여 가공되었다. 탄소와의 합금인 강(강철)은 철보다 더 단단해 삼국시대부터 무기에 적용되었다. 무기 외에는 주로 농기구 제작에 쓰인 철이 고려시대에는 대형 철불, 조선 후기에는 사찰의 공양구와 왕실을 넘어 민간의 생활용품까지 활용되었다. 

     

전시실을 다채로운 빛으로 밝히는 금속공예품들이 일순 밤하늘을 수놓는 별무리 같아 보일 때  천지창조 신화중 하나가 생각났다. 세상은 거인 신이 땅과 하늘을 갈라놓으며 열렸다. 햇빛 같은 금과 달빛 같은 은, 밤의 어둠을 담아낸 철까지, 금속은 지상을 천상의 데칼코마니로 꾸민다. 지상의 반짝이는 모든 것이 천상과 하나였던 흔적이라고 느껴진다.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찬란하게 빛나는 금은 태양을 상징했다. 최고의 권위를 나타내는 화려한 장식구나 화폐 등으로 쓰였다. 부서지지 않고 얇은 판으로 펴지는 전성과 끊어지지 않고 가는 실처럼 늘어나는 연성이 가장 뛰어난 금은 물과 공기에도 변치 않는다. 주조와 단조 기법 위에 정교한 세공이 더하여져 변신의 귀재가 되고 영생을 누린다. 

금관, 허리띠와 띠드리개, 광배, 사리구, 식리(부장용 신)에는 판금이 쓰였다. 금색 종이를 요리조리 오려 낸 듯 표현이 무궁무진하다. 금판의 무늬를 입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뒷면을 두드리는 타출 기법을 썼다. 단조법으로 완성된 금제 완은 두드린 자국의 결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표면이 미끈하고 모양새도 날렵하다. 우리나라 불상은 정밀한 표현이 가능한 밀랍주조법으로 제작된 동 주물에 두텁게 도금을 한 금동제가 다수다. 합금도 쉬우며 금박, 금니(금박 가루를 아교풀에 갠 것)에도 쓰인다. 현대적 미감을 뽐내는 금 귀걸이에는 누금세공이 적용되었다. 가는 금선이나 미세한 금 알갱이를 금판에 접합하는 기술로 당대 우리의 높은 과학 수준을 알려주는 지표이자 국제적 문화교류의 증거이다.   

   

금, 은, 동이 귀한 정도를 나타내는 순서라면 은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다. 은의 존재량은 금보다 훨씬 적고 다루기도 어렵다고 한다. 얇아지는 전성과 늘어나는 연성의 정도가 금 다음이다. 색이 검게 변하는 성질이 있으나 인체에는 독성이 거의 없고 놀랍게도 항균, 방부의 효능을 지닌다. 고대부터 화폐, 식기류와 장식구로 널리 쓰였다.     


금속공예기술의 극한은 금속 상감법이다. 금속에 수정, 마노, 터키석 같은 보석을 물려 넣거나, 선과 면을 파낸 후 색이 대비되는 다른 금속을 끼우거나 두드려 넣는 기법이다. 청동에 은과 금을 입사한 향완, 정병 그리고 철에 은과 구리를 입사한 화로, 등잔, 담배합은 가상현실을 연출한다. 

금속선이 종이 위의 붓 인양 3차원의 금속면 위에서 자유자재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금속이 생명을 얻은 듯 버들가지 되어 하늘하늘 춤을 추고, 사슴 되어 뛰어논다. 빛으로 그린 산수인물화, 화조영모도의 파노라마만이 아니다. 

은은한 흰빛과 중후한 노란빛이 시대를 오가며 다른 재질의 공예품 문양까지 집대성한다. 청화백자의 안료인 코발트처럼 화창과 연판을 세우고, 나전칠기의 자개처럼 격자문과 당초문을 새긴다. 금속 기물에 계절을 잊은 서리꽃과 산수유가 조화롭게 피어난 듯 신비스러운 기운이 어린다.     

매화무늬 담배합(은입사), 국립중앙박물관

금을 제외한 금속은 물, 공기와 접촉하면 부식물인 녹이 생긴다. 일단 표면에 녹이 슬면 바로 내부로 진행되므로 불순물의 제거는 필수다. 금속유물 복원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 외에 새로운 사실을 전해 듣는다. 눈으로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부식의 진행을 막는 녹이 있어 이는 남겨 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주변에 쇠못이 많이 쓰였고 그만큼 녹도 흔했다. 나무 밑동에서 버섯이 자라나듯 검붉은 녹이 번지면 쇠못은 곧 형체를 잃었다. 

그렇게 ‘나쁜 녹’만 기억에 있는데 부식과 방식의 상반된 작용에서 균형점을 찾아간 ‘좋은 녹’이 있다니 신기하다. 전시실 유리 너머 청록색 이물질로 뒤덮인 금속유물에 들었던 염려를 말끔히 지운다. 

    

되짚어보면 금속의 발견과 활용은 모두 놀라운 일의 연속이다. ‘광석을 캐내 광물을 얻고 금속을 가공한다.’ 모든 단계가 얼마나 지난했을지 가늠조차 힘들다. 

지극한 아름다움의 금속공예품 그리고 그 뒤에 자리한 극한의 노동과 무수한 시행착오, 금속이 써 내려간 역사서가 묵직하기만 하다. 

작가의 이전글 22. 우리 옛것과의 만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