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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15. 2022

3. 우리 옛것과의 만남

<와전>에 대하여

귀환     

국립중앙박물관 2층 기증관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우리의 옛 와전들이 있다. 무심히 살펴보다 기증자의 이름과 국적을 발견하게 된다면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박물관에 자신의 컬렉션을 기증한 일본인? 그런데 기증품은 자국의 유물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들이라고?’, 감사한 마음 한편으로 의구심이 든다. ‘이우치 이사오’ 기증실에서 기원전 2세기 중국에서 건너온 와전을 따라가며 역사의 한 자락을 펼쳐본다.  


1987년의 귀환

“분단 상황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고구려사 연구에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현존 수량이 적은 고구려 기와를 더 보내 주십시오.”

“부친이 긴 세월 공들여 완성한 컬렉션에서 중요한 것들입니다. 일본에 남겨야 합니다.”      

일본인 이토 쇼베(?~1946)는 1910년대부터 한국 와전을 다량으로 수집하여 1931년 ‘조선고와전전관’ 전시회를 열고, 대대적인 도록 출간 계획의 일환으로 1939년 『조선와전보 내용견본』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경제적 상황과 전쟁 말기 일본의 사회적 혼란으로 도록은 완성되지 못하고, 1945년 한 일본인 사업가에게 컬렉션은 넘어갔다. 소학교 시절 숙부가 경주에서 사 온 '도깨비 문양 기와'로 한국 기와에 관심을 갖게 된 일본인 내과의사 이우치 이사오(1911~1992). 그는 1964년 학술적 가치가 높은 ‘이토 컬렉션’ 전부를 구입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는 한국을 수십 차례 오가며 남한 지역 출토 와전을 수집하여 컬렉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이우치고문화연구실’을 설립하여 와전을 연구했다. ‘이우치 컬렉션’의 존재와 중요성이 한국에 전해지고 연구실 명의의 『조선와전도보』 전집이 1981년 완간되었다. 도록 출간 전후 이루어진 한국 학자들과의 교류는 “한일 간의 친선을 도모하고 한국의 것은 한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학문적인 양심”에 따른 기증으로 이어졌다. 1987년 당시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입주해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에 파격적으로 일본인 이름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기와 1,082점의 귀향을 맞이했다. 

현재 용산으로 터를 옮긴 유물들이 부산항에 입국하기까지 겪어낸 곡절 많은 사연에는 일본에서 와전을 선별하는 작업을 수행한 이우치 기요시(이우치 이사오의 아들) 선생과 한국 측 담당자의 실랑이도 포함된다. 기증에 관련된 기록에서 와전에 대한 애정과 식견은 같으나 상반된 입장이기에 선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 갈등이 읽힌다. 한일 간의 지난 역사만큼이나 복잡 미묘한 감정들도 현해탄을 건넜을 것이다.  

    


2005년의 귀환

“유물의 운명이지요, 고국을 떠난 지 100여 년이 흘러 진정으로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서 귀국길에 오르게 되는군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입니다. 공공을 위한 유물의 공간을 마련하겠습니다.”     

현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안내판에는 ‘이우치 이사오’와 함께 '유창종'의 이름도 있다. 공직에 있으며 향토사를 연구했던 그는 고구려·백제·신라의 특징을 모두 지닌 충주 탑평리 ‘육엽연화문와당’의 발견을 계기로 기와와 연을 맺는다. 일명 ‘기와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희귀한 낙랑의 와전뿐만 아니라 시대별 와전이 체계적으로 집대성된 『조선와전도보』와 국립중앙박물관의 첫 외국인 기증실, ‘이우치실’에 부러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수집 25년째인 2002년 단일 종류의 기증유물로는 국립박물관 사상 최대인 와전 1873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다. 기증 특별전이 열리고 이후 이우치실과 나란한 ‘유창종실’이 들어선다. 2003년 일본에 남겨진 이우치 컬렉션 중 1300여 점이 새 주인을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기와 검사는 2년여 걸려 구매를 완결한다. 이어 인수한 이우치 컬렉션과 2002년 기증 이후의 수집품을 소장하여 한·중·일·태국·베트남 와전을 비교, 연구하고 대중에 공개하기 위해 2008년 서울 부암동에 '유금와당박물관'을 설립한다. 2003년 일본에서 이루어진 이우치 기요시선생과 유관장의 첫 만남은 어떠했을까. 만감에 젖은 한일 두 소장자는 컬렉션의 구성과 보전에 완벽을 추구하는 학자의 자세, 개인 소장품의 공익적 활용 등에서 공감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과거사에 묶인 감정의 앙금이나 개인의 수집벽, 그리고 유물의 경제적 가치,  어느 한 요소에 방점이 놓인다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두 번째 이우치 컬렉션의 귀향과 뒤이은 국내 최초 와당 전문 사립박물관의 탄생이 극적이다.   

   


와전瓦塼 이야기

와전실에서 연화문, 보상화문, 인동문, 가릉빈가문, 사자문 등의 명칭을 짚어 가다 보면 어쩌면 이렇게 수많은 문양이 가능하지, 의문이 들 정도다. 점토가 아닌 종이 위에 연필로 쓰윽 그려낸 것인가, 아니면 그림 그리기 앱이 그때에도 있었나 싶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우리 산하처럼 오밀조밀한 구성과 봉긋하게 솟아오른 입체의 표현까지, 감탄이 이어진다.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많은 수량이 전시된 연꽃무늬 수막새(연화문원와당)를 살펴봐도 연꽃잎(蓮葉)의 개수와 형태, 연밥(蓮子)의 모양, 주연부의 연주문이 모두 다르다. 거기에 회백색에서 불그스름한 색상의 변주까지 더하여져 지붕 위 만개한 연꽃의 향연이 그려진다.       

이우치 이사오 선생과 유창종 관장에게 와전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문양의 다양한 소재와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 이외에 두 분이 수십 년 동안 공력을 기울이게 만든 와전의 진정한 매력이 무엇일지 답을 찾아본다. 방수, 방화의 기능성이나 길상, 벽사의 상징성이었을까. 국가, 시대, 지역에 따라 형태와 문양의 차이가 분명하여 함께 출토된 유물의 제작 시기를 판정할 때 기준이 되는 와전의 고고학적 가치였을까.


“햇살에 기와를 비춰 보면 도공의 지문 자국이 보여요.” 유관장의 말을 단초로 삼는다. 한 점의 기와를 통해 수백 년 전 옛사람과 대면하는 시간여행을 체험한 것이려니 싶다. 장엄한 궁궐과 사찰의 지붕에 올라 꼭대기까지 이어져 오르며 건축물의 품격을 높여주는 기와가 그러하듯, 가까이 다가서면 분절된 시간들의 조합 같지만 멀어지면 서서히 드러나는 고고하고 장구한 역사의 흐름. 바로 그 역사의 흐름에 수집가이자 연구자, 더 나아가 기증자에 이른 두 분과 와전의 인연도 자리하려니 생각한다.      

기증과 구매의 서로 다른 경로로 완성된 이우치 컬렉션의 귀환은 유물의 가치와 의미에서 예술성, 학술성, 역사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의 환수 같은 국가적 과제에 모범 사례로 손꼽힌다. 전시실을 스치듯 지나치면 유물의 정보는 명칭, 출토지, 시대, 크기, 소장처에 머물지만 자세히 오래 바라보면 한 점의 유물이 거쳐 온 시공간상 궤적까지 되짚게 된다. 역사의 갈피에서 이제는 이름 없이 사라져 버린 장인의 손길과 수없이 발품을 팔고 오랜 세월 유물을 보살펴온 소장자의 애정 어린 눈길이 느껴진다. 전시실을 가득 채워나갈 ‘아름다운 공유’를 꿈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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