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성장은 이제 그만.

수익을 내자.

by 정원

삼십 대 중반의 주인공은 하루키의 소설의 단골손님이다. 좋아하는 작가가 선호하는 연령대로 살아가고 있는 난 가끔 이른 아침에 마시는 아메리카노로 잠시 혼자 하루키의 주인공이 돼본다. 토스트라도 구워서 한 입하는 날엔 정말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한다. 삼십 대 중반이 왜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할까? 적당히는 알건 아는 그래서 아는 것도 적당히 모른 척도 할 수 있는 그런 여우 같은 나이로 인생의 갈등을 얘기한다는 건데. 얼마나 매력적이겠냔 말이다. 작가의 수려한 글 솜씨가 사는데 이렇게 보탬이 된다.


유퀴즈에 나오는 김나영 님은 삼십 대가 제일 힘들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데, 생각해 보면 난 이십 대가 너무 즐거워서 삼십 대가 힘든 것 같다. 가치관도 많이 바뀌었고, 인간관계, 생활습관 모든 게 많이 변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 8시까지는 이직에 필요한 공부를 하고 일주일에 두 번 학원 강사일을 한다. 난 미술 전공자지만 미술을 돈으로 연결시키는데 젬병인 게 명백해져만 갔기에 이직 준비는 미술과 관련이 없다. 미술을 전공해서 시작했던 일들이 물질적으로 나에게 큰 만족감을 줬던 적이 드물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주일에 20시간은 그리려고 노력을 한다. (실상은 15시간) 지킬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정말 미술은… 뭘까? 돈도 안 되는 거 왜 이렇게 손에서 못 놓는지 모르겠다.


놓아야 될 이유도 없지만, 엄마 아빠의 짠한 눈빛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나는 디지털 페인팅을 배우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홍대에 있는 미술학원에 간다. 물어보지도 않은 아빠에게 필라테스 배우는 값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냐고 나름 합리화를 시키고 있다.


도예과에서 순수미술로 편입, 디지털 조형작업, 실크스크린, 과슈 페인팅, 수채화, 유화, 하다못해 가방도 만들 줄 알고, 미술 잡지사에 인턴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번엔 그림책. 내가 그린 삽화에 에세이가 들어간 그림책을 창작하고 싶었다. 작년에 그림책 교육기관에 들어가서 오랜 경력을 갖고 있는 편집자 두 분으로부터 수업을 듣는데, 한 편집자분이 “나는 이 업계에 오래 있어서 정원 씨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지만, 난해해서 독자가 읽다가 중단할 거예요. 아무도 안 읽어도 내가 좋으면 된 거죠.”라는 코멘트를 들었다. 정말 혼란스러웠다. 그림책을 마무리할 텀이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힘이 죽 빠졌다.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 책을 만드는 데 아무도 안 읽을 거라니. 며칠 뒤에 전체 수정을 감행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지은이 김정원


대체 이 업계는 뭔데? 결국, 업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한 출판사에서 소재가 재밌으니 좀 더 사건을 부각하고 여자아이의 등장 빈도를 수정하면 어떻겠냐고 물어왔고 수정이 되면 메일 한번 주세요.라는 답변을 얻었다.


그림책을 준비하면서 미술교육 업체에서 큰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왔었는데 거절했던 게 갑자기 아쉬워졌다. 하지만 수락했다면 그림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미련만 남았을 것이다. 돈과 명예를 버리고 내적 성장에 투자하다니. 이런 내가 싫다. 좀 빠릿빠릿하게 살면 좋을 텐데.


이 브런치만 봐도 구독자 70%는 미술교육창업이 궁금해서 팔로우하신 분들인 것 같다. 제안 메일도 들어오고 미술교육 창업 글이 천 단위 조 횟수를 돌파할 때마다 브런치에서 축하한다며 알림이 뜬다. 그럼에도 나는 천천히 미술 교육업계에 발을 빼는 중이다.


홍대에 있는 디지털 페인팅 학원에서 한 선생님이 내가 지은 동화책을 보고 초등학생 대상으로 만든 책이 아니라 2,30대가 봐야 하는 책이라고 말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입지를 다지고 책을 내 보라고 했다. 자신도 앞으로 책을 낼 계획이라며 노상호의 <보이지 않는 길. 자라는 불안> 책을 빌려 주셨다.



수십 장의 그림들과 에세이가 담긴 책이었는데, 아침에 읽었는데도 와인 한잔에 취해서 몸을 못 가눌 것 같았다. 표면적으로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말들이 적혀있어도 압도적으로 많은 그림들과 작가의 감성이 스며든 단어들이 한데 모여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십 대의 내가 레쓰비 한 캔과 담배 한 대를 태우며 함께 보기 좋은 감성적인 책이었다. 유해한 거라곤 하루 카누 커피 두 잔뿐인 지금이지만 밤이 좋고 친구가 좋았던 이십 대의 기억이 소환돼버렸다.


아무튼 어김없이 토요일마다 디지털 페인팅 수업을 듣고 있는데 젊은 원장님이 나에게 다가와 학원에서 연말 전시를 하는데 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다.


지인끼리 모여하는 전시에 학을 뗀 나는 물어볼 때마다 생각만 해 보겠다며 눈빛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원장님이 “정원 씨 미대도 나오셨고 작업도 좋으니 연말 전시는 그렇고 요번 연말에 코엑스에서 하는 서울 일러스트 페어에 학원 이름으로 나갈 건데 거기 멤버로 나가시는데 어떻겠어요?” 하고 물어왔다. 1년 이상 수강한 분들이 모여서 무언가 기획하느라 이러쿵저러쿵하는 걸 언뜻 듣긴 들었는데, 뜻 밖이었지만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또 돈이 나가는구나. (페어 참가비용, 부스를 갖고 페어에 참가하면 참가자들은 기본 시설비용을 낸다.) 이번에 안 나가면 내 발로 자진해서 나갈 일은 희박할 테니 좋은 기회겠거니(?) 했다. 사실 서울 일러스트 페어는 자기 작품이 프린트된 굿즈를 판매하는 걸 넘어서 업계 관계자들에게 눈도장도 찍고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려고 나오는 곳이다. 일러스트 의뢰가 들어오기도 하고 아무튼 페어 기간 동안 많은 기회들이 오고 간다고 알고 있다. 좋은 기회니까 나가 보라는 엄마 말에 참여비용을 송금하자마자 “하지 말까…?”


독서모임에 나갔다.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왜 그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러스트 페어에 나간다고,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장면을 일러스트로 그릴 거라고 떠들고 있었다.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이렇게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나를 발견하고 나니 정말 무를 수도 없게 되었다. 아무튼 준비를 하게 됐다.


이직 준비를 하고, 시간 강사를 하고, 연말 그림 준비를 하는 이쯤이면 코피가 나야 하는데 밥을 장 챙겨 먹어서인지 코피는 안 난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우당 타당 삶이다. 금쪽같이 쉬는 일요일 아침 K-일러스트 페어(서울 일러스트 페어와 같은 성격의 페어)에 갔다. 1회 페어 때만 해도 분위기가 썰렁했는데 지금은 입지가 커졌는지 오미크론이 한창인데도 서울 일러스트 페어만큼 시끌벅적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회화 전시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 작가와 관람자가 직접 교류하고 작업에 관한 팁도 얻는다. 사람들은 굿즈를 한 움큼 구입하고 탄성까지 지른다. 마침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작가님도 계셨다. 작업시간이라든가 영감을 받는 곳이라든가 자료수집에 관해서 굉장히 디테일한 질문을 했는데 진심을 다해서 대답해 주셨다. 자료사진도 듬뿍 보여 주셨는데, 그림이라는 공통 관심사 덕인지 처음 보는 사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만나 친구와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 같았다. 뿌옇고 뿌옇던 머릿속 안개에 햇살이 내리쬔 느낌이었다. 집에 가서 작가님 그림을 액자에 끼워서 부엌에 뒀는데 볼 때마다 귀여워서 한 번씩 웃는다.


그림을 그리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상업화시키는 과정에 대해 요즘은 어렴풋이 감을 잡아가고 있다. 그렇게 이렇게. 어쩌다 보니. 작업을 멈추지 않다 보니.


내일은 예매를 해둔 롯데 뮤지엄에 관람을 하러 간다. 요새 멍 때리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멍도 열심히 때리고 고요함도 즐기고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는 망상도 즐겨보며…




매거진의 이전글그림책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