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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Oct 03. 2017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일상이 뉴욕으로 옮겨진다면.

<New York, I Love You,2008>

미국에 있는 학교에 편입을 하게 되면서 2년 반 정도 뉴욕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번쩍번쩍한 타임스퀘어, 책자에서 봐왔던 유명한 거리, 박물관, 월스트릿이 뉴요커들의 생활처럼 숨 돌릴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정신없는 첫 학기가 마무리될 때즘, 내가 사는 오래된 아파트의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으로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고 큰 건물들이 연결되어 큰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평수와 구조도 다양했다. 어느 날은 안 되겠다 싶어 항상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맞은편 건물의 옥상에 가보기로 했다. 대충 어림잡은 층수로 내려가 그 건물로 연결된 문을 찾았다. 내 키보다도 작은 문을 허리 굽혀 들어가니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숙소와 샤워장이 보였다. 아직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비어있는 방의 문이 열려있고 사람들의 생활공간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뜻밖의 공간에 대한 놀라움을 뒤로하고 옥상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뉴욕에서 보기 드문 넓은 공간이 나왔다. 왜 이런 곳에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지 의아할 정도로, 한적하고 깨끗한 장소였다. 밤하늘 아래에 노란 조명 주위로 보이는 환풍구와 물탱크가 왠지 모르게 운치 있었다. CCTV도 없는지 내가 종종 다녀가더라도 깐깐한 경비아저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한여름날, 학교 친구들을 데려와 그곳에서 술판을 벌렸다. 낭만적인 루프탑 덕분이었는지, 그곳에서 알게 된 두 친구는 졸업하고 바로 결혼을 했다. <뉴욕 아이 러브 유>는 여러 명의 다국가 출신의 감독들이 모여 뉴욕을 담은 옴니버스형 영화다. 유학 동안, 영어공부를 위해 미국 영화들을 줄기차게 돌려봤었는데, <뉴욕 아이 러브 유>만은 학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돌려봤다.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뉴욕의 불빛과 밤공기 속에 뒤섞인 이 영화는 내가 기억하는 뉴욕이다.


졸업파티 바로 전날 여자 친구에게 차인 순진한 남학생과 휠체어를 탄 채 장난 어린 웃음을 짓는 여자, 서로를 환상하는 보수적인 문화권에 자라온 유대인과 젠, 음악감독의 완벽주의에 의뢰를 그만두려는 더빙 작곡가와 음악감독 비서의 사랑, 자살하려는 오페라 가수와 의문의 컨시에어지,이혼한 흑인 아빠와 백인 엄마를 둔 백인 딸, 술과 진통제를 같이 들이키는 화가와 중국 여자, 바에서 우연히 만나 격렬한 사랑에 빠진 두 남녀, 뉴욕을 떠나고 싶지 않은 남자 친구와 다른 나라로 여행 가고 싶은 여자, 성매매를 하는 여자와 그녀의 직업을 모르고 야한농감을 하는 남자, 권태기가 온 중년부부의 이야기, 혼혈인 사기꾼과 뉴욕대에 다니는 여학생의 시작하는 사랑, 오랫동안 뉴욕에 살아온 노부부, 이 모든 것을 비디오에 담아내는 영상예술가. <뉴욕 아이 러브 유>의 에피소드.
남자와 여자가 담배를 핀다.<출처.뉴옥 아이 러브 유,2008>

시원한 바람이 오가는 늦가을밤, 식당 앞에서 중년의 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핸드폰으로 업무를 본다. 금발의 중년 여성이 반 트렌치코트 사이로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며 식당을 걸어 나온다. 여자는 담배를 입에 문채 손짓으로 통화 중인 남자에게 불을 빌린다. 남자는 골치 아픈 업무를 마치고 불을 빌려준 여자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남은 담배를 태운다. 여자가 침묵을 깨고 뉴욕의 좋은 점을 말하기 시작한다. 여자의 목소리는 불빛이 아른거리는 배경 속에 어떤 불협화음도 내지 않은 채, 분위기에 젖어 있고 남자는 웃음을 머금고 여자를 듣는다. "식당에 남편이 있어요. 저는 이 담배를 끝내자마자, 그 남자와 마주 앉아야 해요. 그런데 그는 저를 쳐다보지 않아요. 오늘 제가 브라와 언더웨어를 입지 않은 것도 알아채지 못해요." 남자는 짐짓 씁쓸한 얼굴로 말한다."아내의 숨은 재능을 몰라보는 안타까운 남자네요." "남자들은 다 그렇지 않나요. 아내를 볼 땐, 장님이 되고 새로운 여자만을 환상하잖아요. 지금 당신은 나와 자고 싶죠?" 남자는 여자의 볼을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려 하지만 여자는 살며시 얼굴을 피한다. 자신을 유혹하는 여자에게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남자는 무엇을 원하냐고 둔탁한 질문을 한다. 여자는 다만 오늘 밤 무언가 바뀌길 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식당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내고 다시 담배를 문다.


카메라는 식당의 내부를 보여주며, 맥주를 담고 있는 웨이터를 거쳐 양손에 생선요리를 들고 있는 웨이트리스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여자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생선접시가 놓이고 웨이트리스로부터 가려진 여자의 남편에게 접시가 놓인다. 웨이트리스의 가벼운 인사가 끝나고 프레임에 들어온 남편의 얼굴은 식당 앞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던 남자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만난 연인처럼,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쳐다본다. 여자는 밀려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냅킨으로 눈물을 훔친다. 이 에피소드를 촬영한 이반 아탈 감독은 애정 하는 뉴욕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이 식당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마다 식당 밖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곤욕이었다고 말하는 감독은 덕분에 누군가의 가슴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영화를 만들었다.


늘 겪어왔던 짜증이 예술이 되어 영화로 만들어지고, 하룻밤의 역할놀이로 오랫동안 굳어왔던 권태로움에 금이 가고, 친구의 호기심으로 만들어진 술자리는 백년해로의 약속으로 이어진, 이런 일상 속 예측 불허는 가히 뉴욕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은 아닐 것이다. 다만, 다양한 문화와 인종 그리고 자유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뉴욕이기에 그 예측 불허하는 변수들의 매력이 돋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https://youtu.be/-eohHwspl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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