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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Oct 12. 2023

부지런함

이불 바라기

적어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나를 에너지 넘치고 쾌활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난 굉장히 무기력하며 침대에 누워만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냥 이왕 사는 거 책임감 있게 살려고 무한 노력중일뿐이다. 한 목숨 잘 챙기고 노후에 아쉬운 소리 듣지 말고 사는 게 내 일신의 목표다.


이 진정한 목표를 알기까지 나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꾀하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워커홀릭인  부모님을 보고 자라서인지 ‘게으름’이란 단어는 내 인생에서 배제돼야 하는 줄 알았지만 내 ‘게으름’을 인정한 뒤론 오히려 집중력 있고 성취감 있게 산다. 게으르게 사는데 집중력도 생기고 성취감이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평일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30분 정도 침대에 꼭 붙어서 스트레칭을 한다. 이불속에 여전히 있지만 무척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


우울하게 다섯을 세고 일어나 바로 사과를 먹는다. 장 내 환경이 좋아야 일상이 평화로우니 의무감으로 우적우적 먹는다. 그런 다음 전날 먹다 남긴 라테를 마시고 학원 수업준비를 하고 출근한다.


원장선생님은 내 수업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신다. 굳이 따로 부탁하신 일도 아닌데 9월 말부터 아이들에게 영작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학생들은 독해는 잘하는데 막상 말하기나 글쓰기를 어려워한다. 이런 우려에선지 대치동에선 이미 영어로 일기와 과학 독후감 쓰기 수업을 한다.


평범한 보습학원에서 영어를 배우는 이 친구들이 지금 실력에서 어디까지 영어가 늘 수 있는지 홀로 테스트 중이다. 똘똘한 친구들은 독해나 문법에서 별로 흥미를 못 느끼기도 하고 나중에 온라인으로 아이들 영어 작문 수업을 진행하고 싶은 것도 있고 여러 이유로 하고 있다.  


수업 내내 주전부리를 한 게 배부르면 저녁을 스킵하고 일찍 잠에 든다. 일어나 다시 사과를 깎고 루틴을 시작한다. 주말에는 오전과 저녁시간에만 공부하고 3시부터 7시까지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다. 어차피 공부에 집중 못 하고 왔다 갔다 할 테니 아예 놔 버리는 거다.


사실 반년 동안 영어 학사 취득 시험을 지겹게 봐서인지 여권 들고 아무 나라로 튀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 달 뒤에 바로 공인 영어 시험을 봐야 한다. 계속 공부를 하고 있는 터라 장이 예민해져 있다. 얼죽아인 나인데 하루에 커피 두 잔에 몬스터볼을 먹고 장이 뒤집어져 이제 나는 강제 얼죽핫이 됐다. 그래도 커피를 계속 마시게 해 준 장에게 고맙다. 가끔 아바라가 당길 땐 내 장의 눈치를 본다. 나 오늘 아이스커피 먹어도 되냐? 안 되냐?


내 인생은 상실감이 있기 전 후로 나눈다 할 수 있는데 실로 에너지 넘쳤던, 상실감 전의 하루는 이렇다.


아침 10시에 일어난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바로 화장실로 직행한다. 샤워를 하고 고속버스를 타고 홍대에 있는 유학 입시 학원으로 향한다. 커피와 주전부리를 사고 저녁 10시까지 계속 포트폴리오를 만든다. 작업할 게 더 남아있으면 친구와 남아서 작업을 하고 아니면 집으로 가서 간식을 먹고 2-3시에 자기도 하고 4시간만 자며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글을 썼다.


주말엔 꼭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회포를 풀며 원대한 꿈을 말하며 서로 잘났다고 연신 칭찬해 주다 헤어진다.


눈치 볼 사람도 못할 것도 가릴 것도 없는 시기를 지나 지금은 적당히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심지어 내 내장기관의 안색까지 살피며 매일같이 태극권을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무엇이  나은 삶인가는 장단점이 있었기에 딱히 단정 지을  없다. 눈치를  보면 뒷일은 처치곤란이지만 스트레스는 없기에  나름대로  시절이 가끔 그립다.


푹신한 이불 덮고 자야 할 시간을 조금 더 벌기 위해 서라도 날마다 정해놓은 일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한다. 이 정도면 숙면하려고 하루를 사는 듯하다.


주말 아침에  자고 싶은  몸을 어르고 보채서 씻지도 않고  커피를 사러 나갔다. 빵가게 직원들이 무표정으로 계속 빵을 만든다.  이렇게 자꾸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그림을 그렸을  이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바빠도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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