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20세기,2016>마이크 밀스,<이방인> 알베르 카뮈.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나를 떠나질 않는다. 언제나. 행복하다는 느낌을 매일 느끼진 않더라도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고 내 몸에 맞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행복에 관한 생각을 5년째 이어오고 있다.
엄마는 행복해? 그런 질문은 하는거 아니야. 행복한지 따져보는 건 우울해지는 지름길이야. <우리의 20세기>.
한편으론, 행복이라는 단어는 존재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스친다. 행복이라는 단어의 기대치때문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나 기회를 섣불리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귀하고 소중한 사람일수도 있음에도. 어리석게도 말이다. 불편한 감정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감정이니까.
행복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집중하기 시작한 시간은 5년전이다. 상실감이 찾아왔다. 상실감이 찾아오기전까진, 나에겐 언제나 돌팔구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 그림으로 대학에 가고 예체능계열의 재능있는 친구들을 만나며 하루 하루를 희열속에 살았다. 그런데, 그런 돌팔구는 어느새 상실감의 늪으로 무너져 있었다. 무대디자이너가 되기위해 오른 유학생활, 모자름을 채우기 위한, 밤낮이 바뀌는 불규칙한 생활습관, 그리고 잦은 부상들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내 길이 아님을 누군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무대디자이너는 내 역량이 아니었다. 그렇게 혀에서 피가나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시원한 얼음을 핥고있던 나였다.
행복하기 위해 '나'라는 사람을 알기까지 크고작은 상실감들이 계속해서 발견되었고 덤덤하게 수용하였다. 내가 정의하는 행복한 삶이란, 내가 잘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좋아하는 일을 하루에 1~2시간정도 소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내가 잘하는 일은 진로탐험을 하며 알바로 쌓아왔던 미술학원강사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갖고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런 행위는 태어나 눈을 뜨면서부터 내안에 항상 자라오던 습관이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사람의 심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사회 생활을 하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이런 습관 덕분인지 일에서 만족감을 얻어오고 있다. 최근에, 참여하고 있는 드로잉 모임에서 이런 나의 생활 패턴을 두고 "정원언니는 휘게라이프 같아요" 라고 타이틀을 달아주었는데, 기분 좋은 말이었다. 내가 가고자하는 길이 내 해진 잠옷같이 편안하게 맞는다는 것을 이제는 타인도 느껴주니 말이다.
사실, 상실감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는 순간, 삶은 얼마동안 기약없이 무의미해진다. 나를 숨쉬게 했던 목표가 내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것이니. 삶은 그저 숨쉬다 떠나면 그만인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지옥같이 무딘 시간의 연속이랄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상실감을 알아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내가 바라보는 사회속의 '이방인'의 행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본연의 나'를 수용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찾아나가며, 일상의 균형을 모색해 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으면 한낱 먼지가 되어버릴 인생을 운명의 소용돌이에 무방비로 몸을 맡기는 것이다.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이방인 청년 뫼르소는 후자의 길을 택하였다.
요양원에 계시던 뫼르소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뫼르소의 유일무이한 피붙이가 세상에 사라졌음에도, 그는 덤덤하게 모친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웃집 남자 불량배 레몽이 여자문제로 뫼르소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며 뫼르소는 불편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는 한낮의 무더위 속 자제력을 잃고 사람을 죽인다. 법원에 재판을 받게되고 그의 변호사는 어머님 상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살인으로 형량을 줄이려 하지만 뫼르소는 그와 무관하다며 판사와 배심원으로부터 사형재판을 선고 받는다.
나의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해 봐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학생 때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그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이방인-상실감을 맞이한 뫼르소의 독백>
뫼르소는 진로에 있어 첫번째 상실감을 알게 되었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 또한 삶의 과정으로 인지하였기에, 덤덤히 수용하였지만, 삶의 마지막 이유였을지도 모를 모친의 부재는 뫼르소가 레몽의 무리한 부탁을 조건없이 들어줄 정도록 슬프고 공허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죽음은 삶이란 땅에 발을 붙일 일말의 의지조차 사라지게 했을것이다.
영화 <우리의 20세기> 등장하는 55살의 도로시아는 사춘기 아들을 둔 싱글맘이다. 그녀는 아들 제이미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고 방황을 할까 항상 염려한다. 도로시아는 전쟁과 대공황 속에서 여성 파일럿이 되기 위해 학교를 다녔지만 전쟁이 종결되고 자연스레 파일럿의 꿈을 버리고 사무직 여성이 된다. 그녀가 즐겨하는 주식투자와 줄담배는 한때 품었던 조종사의 열망을 이따금씩 식혀주는 진통제다. 40살에 아들 제이미를 낳고 이혼을 한 그녀는 스치는 인연들을 지나온 끝에 짐이라는 연인을 만난다. 짐은 그녀에게 매년 생일선물로 경비행기 여행을 선물한다. 짐은 도로시아가 죽을때까지 함께한다.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붓을 들고 하루가 멀다하고 그림을 그렸다. 나를 긴장시켜왔던 것들이 평범해보이고 평범해 보였던것들이 특별해지기 시작했다. 읽고 싶었지만 읽을 수 없었던 책들이 호흡처럼 읽히고 지나치고 흥미없던 노래들이 노곤한 밤의 위로가 되었다. 상실감을 안고있는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노곤한 밤의 위로가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