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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예예 Aug 07. 2022

8월의 서촌 데이트 코스

달콤한 케이크, 멋진 카페를 좋아하는 (전) 미술관 직원의 주말

오래 바라 왔던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나, 소소한 기쁨과 우연한 즐거움이 많았던 토요일이었다. 본래 어제 외출의 목적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하는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전시 관람이었다. 계절, 공간(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과도 너무 잘 어울리고, 최대 규모의 개인전이라는 것도, '한국 고궁과 정원'을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소개도 모두 좋았다. 하지만 결국 야외 전시 작품만 보고 돌아왔다. "대기 시간은 1시간 이상입니다." 안내원 분의 말과 함께 끝이 안 보이게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남편은 이미 고온다습한 날씨에 넋이 나가 있었고, 긴 대기는 무리였다. 아쉽지만 그래도 진주회관 콩국수도 먹고 야외전시를 볼 수 있었다는데 위안을 삼으며 미술관을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쉬운 토요일의 시작이었다.


무지개 너머의 기분

미술관에서 나와 버스를 타려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데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와서 까먹고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은 버스킹이 자주 이뤄지는 곳이라는 걸. 연주가 훌륭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연주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미술관 안에서 잠깐의 웨이팅으로 에어컨 바람을 쐰 덕에 몸에 약간의 냉기가 남아있었으므로 5분 남짓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바이올린 활이 줄을 비비며 음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연주자의 팔 움직임으로 리듬이 만들어지는 모습, 그리고 돌담길에 울려 퍼지는 Over The Rainbow. 소나기로 대기가 축축해서 불쾌하다고 생각했는데 연주가 있으니 꽤 잘 어울리는 날씨란 생각에 피씩하며 아쉬움도 같이 털어냈다. 음악이 이렇게나 힘이 세다. (바이올린 연주자 탁보늬 님의 유튜브)

탁보늬 님의 연주


포기할 수 없는 서촌 그곳

전시 말고도 식도락 코스가 하나 남아있었다. 진주회관에서 콩국수는 소원 성취했으니 다음은 서촌의 빅토리아 베이커리다. 지난겨울 서촌을 산책하다가 빅토리아 베이커리 공사 현장을 보고 2호점인가 하고 설렜는데  알고 보니 아예 옮기신 거였다. 내가 생각하는 서울 내 가장 홈메이드스럽고 사랑스러운 맛의 케이크가 있는 곳. 덕수궁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5분이면 베이커리 근방인 경복궁역 앞에 도착하는 것도 이 더운 날에 훌륭한 경로였다. 마을버스는 기대만큼 시원했고, 시원한 버스 안에서 새로 단장한 광화문 광장을 구경하는 것도 작은 여행 같았다. 서촌 빅토리아 베이커리는 서울숲 때와는 달리 매장 내부에도 테이블이 있어서 먹고 가는 걸 기대했지만, 대기 1번이라 또 기대했지만, 안에 들어가서 손님들을 보니 쉬이 일어날 분은 없어 보였다. 결국 스펀지케이크 하나, 스콘 하나를 테이크 아웃해서 나왔다. 집에 돌아와 저녁에 맛 본 케이크는 역시였다. "라즈베리 쨈 살 걸 그랬어. 아아 역시 빅토리아 베이커리야." 만약 빅토리아 베이커리의 메뉴들을 아직 맛본 적 없다면 인스타그램 맛집으로 생각 마시길. 여긴 맛있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친절하고 그냥 다 잘하는 곳이다. 너무 다 잘하면 의심을 사는 것 같아서 호들갑은 자제하고 써본다.


행복은 빅토리아에 있다.


(전) 미술계 종사자 추천 카페

사실 빅토리아 베이커리 실패는 내 경우의 수 안에 있었다. 이미 버스 안에서 빅토리아 베이커리에 실패할 경우 어디를 갈지까지 준비해두었기 때문에 걱정 없었을 뿐. 빅토리아 베이커리 도보 5분 거리에는 훌륭한 티룸겸 카페 보안여관의 33 마켓이 있다. 참고로 보안여관은 여관이 아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보안여관'을 개조해서 현재 복합 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카페, 프로젝트 공간, 서점, 전시공간, 스테이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계에서 일할 때 전시 보러 왔다가 1층 33 마켓에 들러 차를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곤 했었다. 알고 보니 다른 업계(?) 사람들은 잘 모르는 공간이라 어깨를 으쓱하며 '사람 많은 서촌에 이런 분위기 있는 곳도 있단다?'하고 친구 모시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차(Tea)를 중심으로 하는 곳이지만 커피와 밀크티도 맛있다. (특히 밀크티에 놀랬다.) 디저트도 몇 가지 있고, 직원들도 부담스럽지 않게 친절하다. 그리고 앉아있으면 들리는 대화들이 소란스럽지 않다. 그런 분들이 찾는 곳인가 싶다. 홀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골똘히 생각하며 글을 쓰고 계시는 분들도 보였다. 창이 사방으로 트여있어서 바깥 구경하기도 좋고, 자연스럽게 놓여있는 식물들과 다기, 책까지 멋스럽다. 마침 카페 안에 있는 동안 소나기가 내려서 느긋하게 창가에서 비 구경도 했다. 


쉬느라 사진을 못 찍은 33 마켓. 맞다 전시도 봤다.



핑크빛 하늘 같은 기분

남편은 카페에서 완전히 충전을 마쳤다. 다시 그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나와보니 4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한낮만큼 뜨겁지 않았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보안여관 바로 옆에 있는 사진 책방 이라선 들를까 하다가 좁은 내부에 사람이 많아 보여서 골목으로 향했다.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낯익은 이름의 작가가 전시를 하고 있는  발견하고 들어갔다. 그림도, 이름도 낯익었는데 도록을 보니 이전에 아트페어에서 봤던 작가였다는  알게 됐다. 5 만에  작가님의 그림을 보게 되어 반갑기도 하고 화폭의 크기 만큼이나 더 큰 작가님(?)이 되신 것 같아서 감동적이었다. 5 동안 작가님은 어떤 경험들을 하시고 어떤 노력들을 하셨던 걸까? 동행도 작품들을 모두 좋아해서 나도 충분히 작품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있었다. 오랜만에 장지에 먹으로 그린 그림을 보는데 마음이 평온해졌다. 먹과 한지가 만나서 젖어들고 번지는 이 아름다움, 정말 멋졌다. 먹과 한지에서 느껴지는 습기와 여름날의 풍경이 잘 어울렸다. 그림 곳곳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울창했는데 그래서 더 그림 안의 숲으로, 바다로, 인물들로 빠져들어 감상했던 것 같다. 풍경도, 사람도 섬세한 묘사로 자꾸만 더 들여다 보게 됐다. 그림 속 인물들은 곳곳에서 자기만의 여유를 누리고 있는데 한껏 여유를 즐기는 자태가 어디서 본 것 같을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나도 그 풍경 속에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바다 짠내와 수풀냄새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평소 작가님은 얼마나 섬세하게 주변의 나무와 사람들을 관찰하고 계신걸까? 전시장을 나오기 아쉬웠다. 글을 쓰면서 작가님 인터뷰를 찾았다. 역시나 좋다! ▶조은 작가님의 인터뷰


오토니엘의 전시는 반토막으로 관람했고, 꿉꿉한 날이었지만 돌아오는 길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하루 전체가 핑크빛이었다. 콩국수 웨이팅은 30분을 예상했지만 10분 남짓이었고, 전시는 그래도 야외전시들은 봤다. 우연히 들은 바이올린 연주는 날씨마저 잊게 해 주었고, 빅토리아 베이커리의 맛은 여전했으며, 33 마켓에는 편히 머물 자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5년 만에 본 조은 작가님의 작품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웠다. 어긋나는 계획들 사이로 우연한 행복들이 들어찬 하루였다. 


▶다음 주 데이트 계획을 고민 중이시라면,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8.13.(토)까지 열리는 조은 개인전을 추천합니다. 이런, 토요일까지군요. 작품들을 보고 나면, 나무들이 울창한 바닷가에서 온종일 수영하고 온 기분이 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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