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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예예 Oct 10. 2022

“기대한다, 사랑한다”

버거웠던 사랑의 기댓값

엄마는 늘 안아주면서 말했다. “기대한다, 사랑한다” 축복으로 하는 말이었다. 기대의 주체는 엄마 아빠뿐 아니었다. 부모님 주변의 어른들도 있었다. "다들 걔는 커서 대체 커서 뭐가 될지 너무 기대된다네?" 하고 엄마는 방긋 웃곤 했다. 모두가 사랑으로 한 말들이었다.


기대에 부응하는 자식이고 싶었다

 하필 사랑한다보다 기대한다가 먼저 나왔을까. 어린 나는  부담스러웠다.  기대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엄마 아빠의 딸로서, 우리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한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행복한 우리 가족을 위한 나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성적표를 들고 가면 내 기대와 엄마의 반응은 늘 꽤 큰 격차가 있었다. '국어는 97점, 영어도 잘했으니까 수학 점수가 좀 안 나온 건 기말 때 채우면 되겠지?'희망차게 계산을 하면서 잘한 과목을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엄마는 늘 못한 과목을 아쉬워했다. 나는 잘한 것에 대해서 '이걸 어떻게 잘할 수 있었는지' 얘기하고 싶었고 엄마가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물어보지 않으셨다. 잘 한 건 재능이고 못 한 건 노력하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수익률 떨어지는 자식인 걸까

엄마는 언니를 자랑스러워했다. 언니는 나보다 엄마의 기대를 훨씬 더 많이 채우는 딸이었다. 아이가 재능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두 딸의 이름에 모두 '재능 예' 자를 담은 엄마의 바람을 이루는 딸이었다. 적성검사를 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큰 오각형. '다재다능한 인재'가 언니였다. 엄마는 뭐든 잘하는 언니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어딘가 뾰족한 모양이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점차 나는 잘하는 것도 잘한다고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늘 엄마 아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는 계속해서 아낌없이 지원해주고, 괜찮다고 했지만 아니란 걸 알았다. 실망의 눈빛을 이미 여러 번 읽었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하지만 늘 기대가 벅차다고 느꼈다. '내가 저 기대를 다 갚을 수 있을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벅찼다. 기대에 짓눌린다고 느꼈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떨어지는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엄마 아빠를 탓할 순 없었다. 부모를 탓하는 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부담스러운 기대뿐 아니라 그동안 부모님이 베푼 사랑과 헌신마저 폄하하는 걸로 느껴졌다. 내가 모자란 자식이 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나, 되갚고 있는 건가?'

어릴 땐 자책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성인이 되자 또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모든 부모와 자식 관계는 역전의 시기가 온다. 부모가 자식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이제는 틀린 것이 된 사고방식이나 새로운 기술들을 엄마께 가르쳐 드릴 때 당신의 의견을 고집하시거나 그냥 잘 모르겠으니 니가 해달라고 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크게 실망했다. 내가 기대하던 존경할만한 부모님, 어른의 조건과 엄마의 행동이 어긋날 때마다 아쉬워했다. 엄마 아빠도 내가 부모님을 탐탁지 않아한다는 걸 종종 느끼셨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가 부모님께 받은 상처를 되갚고 있었다.


'어떻게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는 해결됐다. 남편과 대화 중에 그가 던진 물음 덕분이었다.


서운함을 안고 사랑하기

"왜 꼭 부모님을 존경해야 해?" 그는 내가 내세우는 '자녀는 부모님을 존경해야만 한다.'는 굳건한 명제를 무너트렸다. 그는 부모님을 존경하는 건 자식의 선택이라고 했다. 자신은 부모님이 여러모로 훌륭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존경하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부모님을 존경? 하는지는 글쎄 잘 모르겠고, 나도 여보처럼 부모님을 사랑하고 훌륭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헌신적으로 가정을 돌보신 것도 인정하고요. 나도 부모님을 사랑해요." 그의 말을 곱씹으면서 그간 엄마 아빠에 대해 갖고 있던 실망감, 아쉬움, 서운함 동시에 스스로에게 갖고 있던 죄책감이 무너져 내렸다. 아주 단단한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모래성 같았다.


존경과 사랑 그리고 서운함은 공존할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을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론 자녀로서 부모에게 서운한 점들이 있을 수 있단 걸 인정할 수 있게 됐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상처를 줬다고 해서 바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부모를 향해 몹쓸 사람들이라고 욕하진 않을 것이다. 상처를 받고, 서운해하면서도 존경할 수 있고, 때때로 실망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건데. 양가감정이 공존하는 건 거짓말처럼 느껴져서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제는 아니다. 큰 사랑을 주셨지만 상처도 주셨던 나의 사랑하는 부모님.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부모님에게 상처받은 적이 있고, 종종 부모님의 어떤 점들이 아쉬울지라도. 해방감을 느꼈다. 자녀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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