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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예예 Nov 05. 2022

우리 엄마밥은 남달라요!

맛은 아닙니다.

엄마가 차린 집밥을 먹어 본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 기억을 잊지 못했다. 사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은 주부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잊지 못한 것이 맛은 아니란 소리다. 맛 그 이상의 것. 어쩌면 맛에 포함되는 것. 엄마의 식탁은 남다른 게 있었다.


식탁 위의 예술가

엄마는 사람들을 초대해 밥을 먹이는 걸 좋아했다. 밥을 보여주는 걸 좋아했다고 해야 하나. 왜냐하면 엄마가 차려준 밥은 맛보다 멋이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내내 미술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다던 엄마의 손재주는 식탁 위에서 빛을 발했다. 엄마 스스로도 본인의 강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음식을 맛있게는 못해. 대신 예쁘게 차리는 건 자신 있지! 난 그걸 잘해. " 엄마가 자기 입으로 자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몇 개 안 됐는데(그녀는 재주꾼이며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그중 하나가 '밥을 예쁘게 차리는 것'이었다. 반찬마다 가장 어울리는 그릇을 골라 그 반찬이 돋보일 수 있는 적정량을 담고 그릇 주변에 반찬의 기름기가 묻으면 그마저도 깨끗하게 닦아서 차렸다. 고명의 색감과 모양새는 물론 식탁보와 냅킨, 꽃 장식까지 손수 챙겼다. 엄마가 차린 밥상은 작품이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름답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감탄했다. 보통 식사 자리에 초대받으면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난다든지 음식이 너무 맛있어 보인다든지 하는 칭찬을 하기 마련이지만 우리 집 손님들은 늘 "어머 이렇게 예뻐서 어떻게 먹어요, 너무 예뻐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면 나도 행복해졌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엄마가 스스로의 재능을 맘껏 발휘해서 뿌듯함을 느끼는 모습을 보는 거였다. 엄마는 식탁 위의 예술가였다.


성탄 식탁과 설날 식탁 (늘 먹느라 사진이 없어서 언니 협찬)


환대하는 마음

엄마는 사랑이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다.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이 이미 흘러넘치는데도 저 사람은 사랑이 참 많다며 사랑 많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사람. 엄마가 사랑을 가득 품은 건지 사랑이 엄마를 품은 건지 구분이 모호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리고 엄마의 넘치는 사랑은 식탁을 통해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밥상의 차림새가 멋이었다면, 식사 초대의 모든 과정은 환대였다. 나는 엄마에게서 '환대'라는 단어를 어떻게 몸으로 해낼  있는지를 배웠다. 사람들이 문간을 밟기 전부터 레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에 웰컴 문패와  계절의 꽃을 꽃아 걸고, 손님들  사람씩 이름을 정성껏 적어서 자리마다 이름표를 세워두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집에 도착하면 음식을 준비하던 손길을 멈추고 뛰어 나가 눈을 맞추고, 어서 오라며   벌려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엄마는 그렇게 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심이 닿길 간절히 바랐다. 엄마는 사람들이 집에 들어서기 전부터 식탁에 앉고, 같이 식사를 하고, 마치고 집에 가는 길까지 한껏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지금 그때  손님들의 얼굴을 떠올렸을 , 아마도 모두들  마음을 느꼈던  같다. 말간 얼굴들이 떠오른다.



환대받는 얼굴들

 '환대'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이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는데 영 아쉽다. 훨씬 더 큰 단어다. 나는 환대받는 사람들의 얼굴을 많이 봤다. 엄마의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은 어딘가 어린아이 같은 수줍게 행복한 표정이 있었다. 환대받는 이들은 빛났다. 참 아름다웠다.

엄마는 여전히 환대의 식탁을 차린다. 아빠의 삼시세끼 밥상에서도, 친구들을 초대하는 모임에서도. 식탁에 앉는 사람들은 매번 바뀔 테지만 누구든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환대받는 중일 테니까. 엄마 밥이 그리울 때면 생각한다. 내가 그리운 건 밥보다 엄마의 사랑, 환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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