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출근 전 러닝을 거의 다 마쳐갈 때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7킬로미터 지점에 도달한다. 이미 골목길로 들어와 인도의 폭은 좁아져 있다. 한 달 전 폭설 때 쌓인 눈이 여전히 인도 양 끝에 남아 있어 더 좁다. 성인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다.
그때 내 앞에 한 가족이 보였다. 큰 아이를 등교시키러 나온 엄마인 것 같다. 동생은 유모차에 타고 있었다. 나는 점점 거리를 좁혀 간다. 아마 초등학생이었을 큰 아이는 엄마보다 앞서 나가 쭈그렸다 일어났다 하며 땅바닥에서 뭔가 재밌는 걸 발견했는지 혼자 놀고 있다. 엄마도 나를 보았고, 아이에게 말했다.
"Watch out for the runner. Let him pass."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 꽂혔다.
나는 그 순간 정요한이 아니었다. BD도, 한국 남자도 아니었다. 그 엄마는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았다. 말을 걸 필요가 없었다. 그냥 봤고, 읽었고, 딸에게 전달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로 충분했으니까.
억울한 것도,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러너가 맞았으니까.
그치만 나는 늘 내가 규명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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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에 우리 대표님이 한국에서 보스턴으로 출장 오시는 일정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미팅을 만들어야 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목요일 저녁, 나는 퇴근 후 바이오텍 행사로 향했다. 매주 목요일 이곳 켄달스퀘어의 CIC에서 열리는 Venture Café Cambridge라는 모임이다. 주로 보스턴 바이오텍과 스타트업 씬의 사람들이 모이는 네트워킹 행사다.
보스턴에 바이오텍 회사가 천 개쯤 있다는데 그중 500여 개가 CIC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한다. 나도 CIC에서 일하기 때문에 오며 가며 얼굴은 익었지만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날은 그중 한 명에게 먼저 다가가기로 했다. 링크드인으로 그분의 프로필을 미리 훑어보고 갔다. 원래 계획은 단순했다. 항체 쪽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팁을 구하는 것.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분이었다. 우리 대표님 방문 얘기도 꺼냈다. 그러자 그분이 말했다. 행사 스폰서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자기가 여는 건 CEO들만 모이는 프라이빗 이벤트라고. 그러다 문득 덧붙였다.
어제 행사는 CEO 50명이 모였고 스폰서가 Nona였는데, 거기 너네 경쟁사 아니야?
Nona. 항체 업계에서 우리와는 급이 다른 곳이다. 나는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대화는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지만 좋은 정보를 많이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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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5분가량의 짧고 굵은 대화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 첫 번째 음료 티켓을 뗐다. 그날은 유독 사람이 많았다. 150명은 훌쩍 넘었을 거다. 눈 가리고 다트를 던지는 기분이었다. 항체 관련 일을 하는 사람, 혹은 우리 회사와 접점이 생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지만 누가 누군지 알 도리가 없는 군중 안에서 이게 가능한 일일까? 가능성은 모르겠고, 일단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음료를 받고 한 모금 마시며 주변을 스캔했다. 정장. 좀 있어 보이는 실루엣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냥 감각적으로, 홀로 서있던 그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VC였다. 꽤 오래 이야기했다. 스몰톡도, 비즈니스 얘기도, GLP-1 데이터도 나왔다. 대화는 좋았다. 하지만 기회로 이어지진 않았다. 다트는 빗나갔다.
한 바퀴 돌고 두 번째 음료를 받으러 카운터 앞에 줄을 섰다. 음료를 건네주는 직원의 명찰에 숫자가 보였다. 580. 이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하나씩 올라가는 누적 번호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혹시 여기서 제일 높은 번호예요?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보다 높은 분들도 있어요. 저는 여기서 일한 지 9년밖에 안 됐거든요. 이 행사는 벌써 12년이 넘었으니까요.
겸손한 당당함이었다. 그는 Venture Cafe의 Director였다. 매주 수백 명에게 음료를 건네면서, 9년을 이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 같으면서도 이 공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나는 자리였다. 그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는 그냥 맥주 따라주는 사람이었겠지. 그렇지만 나는 그 너머를 알고 있었다.
줄에서 내 뒤에 선 사람의 명찰에도 세 자리 숫자가 보였다. 241. 당신도 높네요! 한마디 던졌더니 그도 웃었다. 그렇게 대화가 열렸다. 서로 뭐 하는 사람인지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가 먼저 소개했다. 나는 내 소개 끝에 지금 어떤 기회를 찾고 있는지를 붙였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사실 지금 맡겨야 하는 항체 일이 하나 있는데.
블레이저를 입은 founder였다. 곧 다시 만나 제대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세 번 던진 다트 중 하나가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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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골목길에서 나는 러너였다. 달리고 있었으니까,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날 저녁 Venture Cafe에서 나는 무엇이었을까. 정장을 눈으로 훑고, 명찰의 숫자를 읽고,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사람. 기회의 냄새를 맡으며 군중 속을 움직이는 사람.
누가 봐도 BD가 맞았다.
달리는 사람은 러너가 된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도둑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규명되고 싶은 대로 살고 있었던 걸까.
그날만큼은, 그랬던 것 같다. 매일 아침 달리는 건 이제 습관이 됐다. 매일 저녁 BD로 사는 건 아직 용기가 필요하다.
가능성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 다트를 들었다.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모르는 사람과 악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