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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브 Jan 18. 2022

침략





대략 15년 전쯤의 일이다. 녀석은 언제나처럼 어슬렁거리며 내 기숙사 방을 찾아왔다.


탁자 위의 손바닥만 한 TV에서는 아프리카 내전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고 있었고, 나는 습관적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고 닥치는 대로 인하고 강간하고 납치까지 하고 아이들까지 총으로 쏴 죽이고 저걸 그냥 모른 척 두고 봐야 하는 건지 난 도저히 모르겠네."


녀석은 책장 위에 있는 술병을 들고 와서 유리잔에 따라주며 대답했다.


"우리가 보는 시각과 다를 수 있겠지."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병째로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시각에서 저런 게 용인될 수가 있는 거지? 이걸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죄를 짓는 기분인데"


그날따라 녀석은 입을 닫은 채 말이 없었다.

나는 잔에 있던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켜고 책장에서 술을 한병 더 꺼내면서 울분을 털어냈다.


녀석은 구석에 세워져 있던 키보드를 가져와서 어설픈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술에 취하면 연주 실력이 확 늘어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취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녀석은 노래까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따라 부르며 술잔을 계속해서 채웠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째서인지 학교 근처의 단골 술집에서 녀석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이상한 놈들이 학교에서 마구 죽이고 있어!”

갑자기 한 녀석이 피투성이가 된 채 달려와서 소리친 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술집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학생 몇 명이 재빨리 문으로 뛰어나가자, 모두가 앞다투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우리도 얼떨결에 따라가고 있었다.


건물 뒷문을 통해 학교로 진입하려는 우리는 어느새 수십 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교로 진입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절반 정도가 몸이 반 동강이 된 채 쓰러졌다. 우리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정신을 가다듬을 수도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를 향해 뛸 수밖에 없었다.


미래인이다.”

옆에서 사방을 곁 눈짓하며 뛰던 녀석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래인이건 과거인이건 나는 모든 것을 본능에 맡기고 두 다리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에 바빴다.



사방에서 괴상한 쇳소리와 비명 소리, 흐느끼는 소리가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고, 미래인처럼 보이는 생물들은 굳은 표정으로 인간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은 흥분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하고 성실하게 한 명씩 도살해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짓이겨진 다리 네 개 정도가 옆으로 날아왔다. 나는 몸을 돌려 간신히 피했고, 녀석은 돌려차기로 그중 하나를 튕겨 내 버렸다. 어느새 주변의 들판이 핏빛으로 물들여지고 있었는데 그 확산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듯했다.


“미래인이라면 미래에서 온 건가? 그런데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말했다.


"미래에서 온 건지 어디서 온건진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우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모양이야."

녀석도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맘에 안 든다고 이렇게 그냥 싹 다 죽여버리는 게 미래의 법칙인 건가?!"

“그게 말이지..”


갑자기 뭔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 나는 몸을 회전시키면서 팔과 다리를 크게 휘둘렀다. 마치 벌레나 작은 생물이 죽기 전에 버둥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어느새 몸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녀석은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내 몸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잠시 녀석에게 한눈을 판 사이에 뭔가가 왼팔을 스친 것 같았고, 혈액이 급속히 몸 밖으로 유출되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렇지만 뭔가를 생각할 여유 없었다. 최대한 붉은빛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리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나는 뛰는 것만큼은 꽤나 자신이 있었지만 더 이상은 뛰지 못할 것이란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내 심장은 지구 전체를 딛고 뛰어나가고 있었고, 그는 아직 내 몸에 잘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붉게 물들지 않은 곳은 내 시야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제외하곤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얼마 뒤 집중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나는 뭔가를 헛디뎌 넘어질 뻔했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수없이 넘어져 본 경험으로 봐서는 분명히 넘어졌어야 하는 상황인데 넘어지지 않았다. 약간 공중을 날아 자세를 되찾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나만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남김없이 말끔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아니 짓이겨지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절대 짓이겨지고 싶지 않았다. 구멍이 뚫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에 개구리나 잠자리에 구멍은 뚫어 봤지만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이것은 굉장히 이상하다.


눈에 피가 튀어 들어가서 따끔거렸다. 다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온몸에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 멈추는지 잊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자연스럽다.


다행스럽게도 저 멀리 출구처럼 보이는  커다란 철문이 보였다. 하지곧 닿을 듯한 그곳은 아무리 뛰고 뛰어도 닿지 못하고 있었다. 가는 길의 양쪽 벽에 큰 구멍이 연속적으로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녀석이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재빨리 한쪽 벽으로 뛰어가 구멍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구멍은 막혀 있었다. 그리고 꽤 많은 생존자들이 구멍에서 나오다가 몸이 여러 갈래로 찢기는 것이 보였다.


학살자들은 매우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그들의 일에 집중했다. 한 구멍에서는 벌거벗은 남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서로를 즐기다가 겹쳐진 채 한꺼번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것이 보였다. 미래인이든 뭐든 간에 나는 너무 많이 뛰었고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뛰면 뛸수록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처럼 느껴졌고, 조금씩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과 멀리서부터 점점 크게 들려오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되는 것이 기절할 정도로 싫었다.


갑자기 뭔가 커다란 무언가에 부딪힌 나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은 것들이 가득한 바닥에는 당연한 것처럼 시체들이 즐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체들 중에는 절망과 아름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죽음과 슬픔과 기쁨과 설렘이 뒤섞인 그곳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뒤엉켜져 있었다. 그리고 마치 존재하면서도 분명하게 존재하는 않는 강한 비존재감을 느꼈다.





쓰러진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 있었다. 얼굴에는 정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정신이 몽롱해서 알아채기 어려웠지만 천천히 보다 보니 분명히 없었다. 그 무언가의 얼굴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입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입지 않았는데 생식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피부는 알몸에 맞게 진화한 듯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나는 강한 시선이 느껴져서 다시 그 무언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기계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말하는 것, 먹는 것, 섹스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나에게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굳이 말하지 않아도 뇌파로 충분히 의사전달은 가능하다. 하지 않을 뿐이지.


무언가가 나의 뇌 속으로 뇌파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뇌파로 대답할 수 없었다. 지친 나머지 말할 힘도 없었다. 온몸이 서서히 부서져 가는 게 느껴졌다.


- 먹지 않아도 충분히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많다. 그런데도 먹는 이유는 한 가지. 그냥 생각 없이 하던 대로 하는 것뿐이지. 섹스도 마찬가지다. 성교와 임신 그리고 출산보다 훨씬 안전하게 번식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기술이 아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단지 심심해서 섹스를 하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도 못 하고 먹지도 못하고 섹스도 못하는데 그게 사는 거냐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기운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죽을힘을 다해서 몸을 일으켜서 다시 커다란 문 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다. 왜 뛰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가 그쪽으로 뛰고 있었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먹고 말하고 섹스하고 싶어서 죽기 살기로 뛰는 건 아니었다. 그럼 대체 왜 뛰고 있는 것인지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녀석은 거의 숨만 붙어있는 채로 나에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뛰면서 녀석을 향해 온 힘을 집중해서 뇌파를 보냈다. 왜 뛰고 있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는 형상을 뇌파로 보냈다. 놀랍게도 녀석은 뭔가를 들듯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그렇지만 대답은 하지 못했다.


갑자기 나는 문에 닿았다. 그것은 아늑하게 높고 두꺼운 금속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눈이 부셔서 뜨지 못할 정도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었다.


다행히 문은 열려 있었다. 약간 힘을 주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양 옆으로 열렸다.



.

.

.



나는 철문밖의 광경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잠에서 깨 버렸다.


너무 생생했던 그곳모습은 아무리 다시 떠올리려고 해도 까마득하는 느낌만 가득할 뿐 도저히 기억을 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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