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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학사 Apr 06. 2023

홉스 리바이어던(5)

당시 모든 지식인의 학문 '광학'

전학사

     

홉스가 베이컨의 비서로 일했던 점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은 기회였을 거 같습니다.






권박사      


저는 어떤 타고난 자질이나 능력은 베이컨보다 홉스가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학사      


베이컨과 홉스와 같은 인연이 시간이 250여 년이 흐르고 다음에 프랑스에서도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의 비서로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일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시인입니다.      



27세의 릴케(좌)와 62세의 로댕(우)



홉스가 데번셔 백작의 가문에 의탁하고 있을 때, 영국에서 내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란은 당시 발생했던 영국의 역사들을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침략하기도 하고, 이후에 우리가 알고 계시는 청교도혁명이 이어졌습니다. 호국경 크롬웰이 이끌었던 청교도혁명을 통해서 왕당파와 의회파가 교전을 전투를 벌이는 작은 의미의 잉글랜드 내전도 발발했습니다.      


그때 당시에 홉스는 프랑스로 가서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권박사      


홉스는 왕당파죠     






전학사      


왕당파 소속으로 마흔여섯 살 때 파리로 망명 생활을 시작합니다. 망명 2년 째인 마흔여덟에 또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홉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와의 만났습니다. 이때 당시는 학자들은 모든 것을 다했어요. 과학도 했고 철학도 했고 진짜 이때는 오늘날 꿈꾸는 융합적 학문을 했다고 볼 수 있네요. 





    

권박사      


융합이라기보다는 아직 학문의 분화가 덜 된 상태였던 거죠. 또 학문은 소수 사람들만 할 수 있었던 특권이었고요. 그래서 한 명의 똑똑한 사람이 전분야의 학문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학사      


당시 홉스는 광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광학이 이때 당시 최첨단 학문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AI와 비교하면 될 듯합니다. 갈릴레이가 광학에 최고의 전문가였습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자체적으로 개발을 해서 천체를 관찰했고 지동설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권박사      


그 시대에 ‘광학’이 집중 조명받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느 날 ‘와, 이거 재밌겠네’ 하고 생겨난 학문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 대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인식론’은 외부의 사물이 그대로 우리 정신에 입력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전학사라는 사람 얼굴을 보면 그게 그대로 내 정신에 들어와서 전학사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은 단순했습니다.      


홉스 시대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인식의 과정에서도 인간의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전학사 얼굴을 보면 그대로 내 정신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대상을 인식한 인간이 스스로 재처리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인식론의 등장이고, 이 인식론을 ‘신과학’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감각에 대해서 연구를 더 많이 하게 되면, 자연히 ‘광학’ 즉, 빛이 어떻게 우리의 감각 지각에 영향을 미치나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그러면서 광학이 새로운 철학의 조류 최일선에 서는 학문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은 철학 저작들 보면 ‘감각’에 대한 주제부터 논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시작도 그렇고, 스피노자의 『에티카(윤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학사      

마침 제가 스피노자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권박사님이 먼저 말씀을 주셨네요.


스피노자(출처 : 위키피디아),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아니다.





권박사      

아, 그런가요?     






전학사      

스피노자가 광학을 이용하여 안경을 만들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갈릴레이 이야기로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갈릴레이 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일화가 종교 재판입니다. 종교 재판에서 가톨릭 성직자였던 재판관들은 ‘너의 지동설을 포기를 해라’라고 판결했고, 갈릴레이는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는 각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뒤돌아서면서 갈릴레이는 “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 드라마틱한 일화는 18세기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바레티의 창작이라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동설’이 갈릴레이만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갈릴레이가 관찰한 금성의 위상변화(출처 : 위키피디아)




권박사      

맞습니다.     






전학사      


‘지동설’이 홉스 시대에 창안된 개념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던 아이디어였습니다. 


물론 갈릴레이 이전에는 폴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였던 코페르니쿠스 100년 전 지동설을 정리해 출판을 했지만 종교재판을 받거나 탄압받는 등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책도 과학적 관찰을 바탕으로 쓴 것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철학적 사고에서 나온 저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자신이 제작한 망원경을 통해서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했고 지동설을 실증하게 됩니다. 갈릴레이는 홉스를 만나기 전인 1633년에 종교 재판을 받았는데, 이미 재판으로부터 약 20년 전인 1616년 종교 재판에서 지동설은 ‘이단’을 결정한 바 있습니다.     





권박사      


케플러는 어느 시대 때 사람이죠?           






전학사      


케플러와 갈릴레이는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두 사람 보다 100년 전 사람입니다.






권박사     


우리가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는 시대는 조선의 임진왜란 시대와 비슷하겠네요.     






전학사      


지동설과 관련해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케플러와 갈릴레이는 서로 지식적으로 교류하던 사이였다고 합니다.


갈릴레오가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 1597년 8월 4일에 쓰였다.(출처 : 위키피디아)

     

케플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실 수학자 였는데, 수학법칙으로 지동설을 증명한 『신천문학』을 1609년 발간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루돌프 2세였습니다. 루돌프 2세가 워낙 점성술, 연금술 등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어서 케플러는 가톨릭의 눈치에 자유롭게 학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케플러가 자신이 수학적으로 계산한 ‘지동설’을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과학적 관찰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레이에게 망원경을 빌려달라고 이야기도 했다는데 갈릴레이가 빌려주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케플러는 스스로 망원경을 제작했고 천체를 관측했습니다. 접안렌즈가 오목렌즈인 칼릴레이식 망원경과 달리, 케플러는 접안렌즈가 볼록렌즈인 망원경을 발명했습니다. 오늘날 천체 망원경 중 굴절 망원경 대부분은 넓은 영역을 관찰할 수 있는 케플러식이 선호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코스모스』의 저자로 유명한 칼 세이건도 케플러를 "마지막 점성술사이자 첫 천체물리학자"라고 멋진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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