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은 당시 집단지성의 결정체였다.
* 참고 : 본문에서 『리바이어던』는 홉스가 저술한 책을 의미하고, '리바이어던'은 홉스가 창안한 사회계약으로 탄생한 질서를 의미합니다.
전학사
홉스가 나이 쉰두 살이 될 때 영국 내전이 시작되었고 유럽 대륙에서 11년간 망명생활을 합니다. 홉스는 내전 기간 동안 훗날 왕정복고로 영국의 국왕이 되는 찰스 2세의 수학 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리바이어던』는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국왕 찰스 1세의 목을 자른 1649년으로부터 2년 후인 1651년 출간되었습니다. 책 내용의 급진성에 홉스는 같은 왕당파에게 살해 위협을 받았고, 그 까닭에 1년 후인 1652년 영국으로 귀환을 하기도 했습니다.
홉스가 귀국했을 때 영국은 크롬웰이 통치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종신 호국경으로 취임한 크롬웰은 영국 의회를 해산하고 군사독재를 시작했습니다.
원리주의적 청교도였던 크롬웰 치세에는 엄격한 사회제도와 가혹한 통치 때문에 민중들은 더 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노래라고는 유행가는 금지되었고, 찬송가만 부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1658년 크롬웰은 독감으로 죽었습니다.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을 호국경 자리를 승계받기로 했으나, 의회의 반 크롬웰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크롬웰 아들을 축출했습니다.
민중들이 크롬웰 시절 보다 예전 왕정이 낫다고 하는 판이었는데, 아들에게 까지 호국경 지위를 세습하려고 했으니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봅니다.
프랑스에 망명가 있던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1660년 왕정복고가 됩니다. 그리고 크롬웰은 시신인 상태로 효수가 되었고, 그를 따랐던 의회파에 대한 피의 복수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권기돈
마치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 복위문제로 일으킨 복수인 ‘갑자사화’가 생각나네요.
전학사
이런 혼돈의 상황에서 홉스는 연세가 많으셔서, 큰 정치적 활동은 없었다고 합니다. 또 나섰다가는 왕당파에게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영국 내전 중에도 살아남으셨던 홉스는 찰스 2세 치세에도 살아남으셔서 1679년 죽었습니다.
권기돈
91세에 죽었으니, 역사상 보기 드문 천수를 누린 대학자입니다.
전학사
참 아이러니한 점은 홉스가 사망하고 같은 해 본인이 수학했던 옥스퍼드에서는 리바이어던을 금지 도서로 지정을 하게 됩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 기독교에 대한 진보적인 생각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기독교에 대한 담론은 신학에 머물러 있지만,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홉스가 살던 시대에는 사회 전체를 좌우하는 주제였습니다.
권박사
『리바이어던』은 크게 4부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소제목은 1부는 ‘인간에 대하여’. 2부는 ‘코먼웰스에 대하여’, 3부는 ‘그리스도교 코먼웰스에 대하여’, 4부는 ‘어둠의 나라에 대하여’입니다.
우리가 주로 다룰 내용은 ‘사회계약’과 관련된 내용이라서 『리바이어던』의 3, 4부는 다루지 않지만, 『리바이어던』의 1, 2부까지 내용은 그 이전의 다양한 학자가 내놓은 저작에서 상당히 많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리바이어던』이 나왔던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핵심적인 부분은 3, 4부라고 봐야 합니다.
홉스는 기존의 정통적 기독교 해석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정말 이단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그런 과감한 성경 해석을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리바이어던』은 금서가 되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홉스를 '기독교적 무신론자(christian atheist)' 부르기도 했는데, 홉스 자신도 무신론자로 언
제 처형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전학사
과학적 근거가 없으니 신의 존재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이라고도 볼 수 있네요.
홉스 사후에도 영국 시민혁명은 계속되어 입헌군주제라고 하는 오늘날 영국의 통치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권박사
권리장전으로 입헌군주제가 확립된 명예혁명은 언제였죠?
전학사
1688년이었습니다. 홉스가 사망할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찰스 2세의 아들 제임스 2세가 추방되고,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윌리엄 3세가 영국으로 와 ‘권리장전’을 승리하면서 입헌군주제가 정립되었습니다.
권박사
그 시대를 학문적으로 통칭해서 ‘영국혁명’이라고 합니다.
전학사
1679년 사망한 홉스는 영국혁명 결론은 보지 못했지만, 평생을 혁명의 시대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리바이어던』에서 저희가 논의할 핵심이 ‘사회계약론’입니다.
‘사회계약론’은 간단하게 사람들이 사회적 약속을 통해 어떤 본인들의 권력을 나눠서 하나의 새로운 더 큰 권력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홉스 이후에 로크와 루소와 같은 학자들도 ‘사회계약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존 로크는 홉스보다 조금 늦은 시대 사람으로 명예혁명 이후에 영국에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루소는 홉스 사후 약 50년 후인 1712년 태어난 인물인데,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홉스, 로크, 루소가 말하는 ‘사회계약론’이 차이가 있습니다.
홉스는 인간을 악한 존재로 보는데, 서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에게 자연권이라고 하는 권리를 서로 나눠서 자기가 피해 보는 것을 조금 감수하더라도 서로를 지킬 수 있는 하나의 사회계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로크는 홉스와 출발이 다릅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 이기 때문에, 사회 평화라는 가치를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나누는 사회계약을 맺어 통치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루소는 홉스의 사회계약 이론 위에 혁명이라는 아이디어를 더 추가했습니다. 홉스는 사람들이 '리바이어던'을 만들면 모든 인간의 권리를 위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권박사
'리바이어던'을 법 그 자체로 봤었죠.
전학사
루소는 우리가 사회계약을 해서 '리바이어던'을 만들어 냈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인 자연권을 침해하면 이 리바이어던 또한 혁명을 통해 무너뜨릴 수 있다고 봤습니다.
권박사
'리바이어던'이 만들어질 때까지 아이디어는 모든 사회계약 이론 자체가 다 비슷비슷합니다.
'리바이어던'의 홉스 버전은 주권자한테 정말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게 되는 거고, 루소 같은 경우는 다릅니다.
루소는 기본적으로 사회는 시민들의 계약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주권자가 시민들의 자연권인 자유 등을 침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이 발전되어 프랑스혁명에서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다시는 왕권신수설이라고 해서 왕이 절대적 주권을 가진 시대였습니다. 루소는 자신의 정치 철학적으로 그 절대왕정을 깨 부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계약론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현대 학자가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을 쓴 존 롤스가 있습니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네가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네가 어떤 사회에 태어나고 싶니?’ 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을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고 번역합니다.
우리가 이 ‘오리지널 포지션’에서 어떤 사회를 구성한다고 했을 때, 질문은 ‘불평등이 많은 사회에 태어나고 싶니? 아니면 평등한 사회에 태어나고 싶니?’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네가 아주 부자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아주 가난하게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사회에 살고 싶니?’ 아니면 ‘비슷하게 사는 그런 사회에 태어나고 싶니?’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사람들은 무조건 가능한 한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선택을 할 것이다고 롤스는 봤습니다. 그래서 사회계약론적인 요소가 아주 강한 학자죠.
전학사
그런데 박사님 홉스가 '사회계약론'의 시초가 아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누구인가요?
권박사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라는 법학자입니다. 홉스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홉스 생전에 이미 그로티우스가 쓴 국제법과 관련된 저작을 봤을 것이고, 거기서 사회계약론을 발전시켰을 것입니다.
그로티우스의 이론을 독일에서 발전시킨 푸펜도르프라는 법학자도 있습니다. 푸펜도르프는 국제사회가 자연상태에 있다고 봤기에 사회계약적 관점에서 국제법을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국제법 논의가 활발했던 이유는 30년 전쟁이라는 지금까지 없었던 국제전 이후에 사회 질서를 되찾고자 했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홉스는 당대의 국제법적 아이디어를 『리바이어던』 체계 속으로 받아들였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