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러비안 크루즈
방바닥에서 애들과 자고 있던 내가 잠에서 깨어나 침대 위를 살피니 남편은 벌써 화장실에서 샤워중이다. 우리 둘다 알람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일어난 걸 보면 여행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집에서 JFK 공항까지 우버를 타고 갔다. 우리 여권이 다 있는지 확인하고 있는 남편에게 우버기사가 말했다. 자기가 태운 손님 중에 집에 두고 온 여권 때문에 공항에서 집까지 왔다갔다하다가 비행기를 놓쳐 1500불을 더 내고 비행기 티켓을 새로 사서 떠난 사람이 있었다고. 우버 기사도 그 날 그 손님에게 택시비로 적지 않은 돈을 받았을 것이다. 공항에 시간 맞춰 도착했는데 여권이 없다니. 조금만 더 열심히 그 상황을 상상했다면 나는 비명을 질렀을거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뉴욕에서는 가보지 못한 Shake Shack. 아침부터 햄버거를 먹을 수는 없어서 계란치즈 샌드위치를 사먹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할머니 한 분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보통 휠체어, 기내에 진입할 수 휠체어에서 비행기좌석까지 할머니가 옮겨 앉는 동안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우리 뒤로는 비행기 티켓을 가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그 할머니의 딸, 할머니의 간병인처럼 보이는 여자, 그리고 개 한마리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나는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딸은 승무원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혼자 일어설 수도 없고 앉아있을 때도 무릎을 굽힐 수 없었다. 승무원들이 할머니를 도울 때마다 할머니의 몸이 진흙덩어리처럼 밑으로 흘러내려가는 듯 보였다. 할머니가 우리처럼 여행을 떠나는 건지 아니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건강하고 가벼운 할머니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비행기 안에서 남편이 또 회사일을 했다. 옆에 있지만 없는거나 다름없는 이 상태를 나는 언제까지 참아낼 수 있을까. 딸아이가 사과주스를 엎지르고 내 눈치를 한 번 보더니 컵에 남은 주스를 다 마셔버렸다. 나는 그걸 못 본 척 넘어가려다 딸아이 속옷까지 젖을까봐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그리고 둘째가 덮고 있던 담요를 딸아이 엉덩이 밑에 깔아줬다. 내가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딸아이는 내가 화가 많이 나있다는 걸 안다. 나는 딸아이에게 조용히 눈을 감고 잠들라고 명령했다.
플로리다 공항에서는 오타와에서 먼저 도착하신 시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시부모님이 한국에서 사다주신 책을 빨리 읽고 싶어서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가방에서 책을 꺼내주실 때까지 크게 웃지 않았다.
몇 년 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에 갔을 때 <보통의 존재>를 서점에서 서서 읽다가 눈물을 찔끔 흘렸었다. 그 길로 책을 사서 하루만에 다 읽어버리고 여기저기 이사다니면서도 잘 챙겨다닌 보통의 존재다.
제대를 하고 몬트리올에 있던 동생이 보스턴에 잠깐 살고 있던 나를 만나러 왔을 때 읽어보라고 <보통의 존재>를 빌려줬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동생한테 책을 돌려달라니까 마음에 드는 여자애가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빌려줬다고 했다. 그래서 그 여자애와는 잘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동생은 책 한 권 잃어버린 셈 치라고 했다. 이게 벌써 3년 전 일이라니 우리는 꾸역꾸역 잘도 살아간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다 읽기도 전에 "어제 했어야 좋은 말"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Fargo에는 눈이 내렸고 뉴저지에는 비가 와서 추웠는데 우리는 지금 플로리다에서 여름옷을 입고 있다. 어른들에게는 여행 자체가 놀이공원인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