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류연재

우리가 싸우면

by 준혜이

어제 딸아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베테랑을 보면서 둘째랑 놀았다. 오랜만에 보는 영화라 너무 좋았는지 밤에 나는 남편이 낯선 사람과 피범벅이 되도록 싸우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네가 싸우는 꿈을 꾸었으니 조심하라고.


저녁이 되어 남편이랑 비디오챗을 하려고 아이들과 식탁에 둘러앉았다. 자주 떨어뜨려서 그런건지 내 스마트폰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는다. 노트북을 펼치고 비디오챗을 할 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짜증을 낸다. 나도 소리를 지른다. 딸아이가 운다. 둘째는 노트북을 신나게 두드린다.


남편은 저녁식사를 하러 가려고 차 안에서 회사동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도 아이들이 보고싶어 연락을 했지만 아이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


비디오챗을 하자는 카톡을 받고 나는 놀고 있는 딸아이를 두 번, 세 번 불러서 식탁의자에 앉혔다. 식탁 위의 플레이도, 색연필, 장난감들을 둘째의 손이 닿지 않게 대충 한 쪽으로 밀어놓고 둘째를 데려와 아기 의자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운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안되니까 창가에 둔 노트북을 식탁 위에 쌓여 있는 물건들 위로 삐뚤게 올려놓는다. 둘째의 손 끝에 노트북이 닿는다.


남편이 차 안에서 답답한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내가 집에서 허둥지둥 하는 동안 우리가 서로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었다면 오늘의 일기는 없다. 각자 따로 모아온 스트레스를 잠깐의 짜증으로 찔러서 터뜨리면 온 가족이 괴롭다는 걸 잘 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니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예전에는 남편이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를 하면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더 화가 난다. 남편과 둘이 살 때 나는 싸움은 구경거리, 화해는 시시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우리 싸움에는 진짜 구경꾼이 있다. 울고 있는 딸아이에게 우리의 화해를 들려주고 용서를 구해야한다.


그동안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을 잘하는 남자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는각이다.


아이들은 잠들고, 나는 남편에게 미안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역시 싸움은 먼저 피가 나거나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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