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류연재

남편의 런닝셔츠

by 준혜이

셔츠 속에 반팔 런닝셔츠를 빼놓지 않고 입는 남편은 아이 같고 정숙하다. 속옷이 비치는 게 싫어서 교복 블라우스 속에 민소매 티셔츠를 꼭 챙겨입었던 나는 요즘 타락해서 노브라다.


나는 남편의 거의 모든 행동을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게으른 사랑이 준 착각이었다.


런닝셔츠를 모자라게 챙겨간 남편은 잠들기 전 손빨래를 했다고 한다. 아침이 되었지만 마르지 않은 런닝셔츠를 말리기 위해 남편은 젖은 런닝을 전자렌지에 넣어 돌렸다. 화상입은 런닝 셔츠에서는 팝콘 타는 냄새가 난다고 남편이 전해주었다.


나였으면 마르지 않은 런닝을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전날 입었던 런닝셔츠를 입었을텐데, 손빨래한 런닝셔츠가 타버렸으면 빨래는 못했지만 멀쩡하게 생긴 런닝 셔츠를 입고 출근할텐데 남편은 구멍난 런닝 셔츠를 입었다. 자신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남편의 의지가 엿보인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같아지지 않고 다르다.


남편은 내 부탁이 아니었다면 런닝 셔츠를 버리고 왔을 것이다.


나는 딸아이에게 남편이 런닝셔츠에 저지른 만행을 이야기해주고 구멍난 런닝셔츠를 선물했다.


우리의 다름이 만나는 곳에 뜻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이 같지 않아도 괜찮고 행복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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